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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창조경제와 ‘저녁이 있는 삶’

중앙일보 2015.09.07 00:26 종합 35면 지면보기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2012년 대선 당시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선거 구호는 중산층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여가를 보내는, 그 당연해 보이는 하루 일과가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구호에 대한 큰 반응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의외의 큰 반응은 여유 없이 항상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팍팍한 우리네 삶의 모습의 방증이기도 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노동개혁 관련 논의를 지켜보면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청년 고용 문제 해결과 관련해 임금피크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오히려 전반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그만큼의 고용을 늘리는 방안이 더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기 후반기로 접어든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정책 목표는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그리고 복지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서로 긴밀하게 연계돼 있는 정책이지만 지금까지의 정책 추진 모습을 보면 이 세 가지 정책이 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노동개혁은 큰 틀에서 이 세 가지를 묶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 정책은 역시 창조경제일 것이다. 그 개념의 모호성에 대한 논란이 없진 않지만 원래 ‘창조적’이란 것이 엄밀하게 개념 규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창조경제의 추진 주체와 그 결과에 대한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관료 조직과 대기업에 의해 창조경제가 제대로 주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의 위계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하고, 때로는 상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강한 위계 구조와 상명하복의 질서를 가진 관료 기구나 그런 기업 문화를 가진 우리 대기업 조직이 창조경제를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창조경제의 주체는 거대한 조직보다 혁신과 창의로 무장한 국민 개개인이 돼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편안한 저녁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빡빡한 생활에 치여 사는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글이나 애플과 같이 혁신과 창조를 강조하는 미국의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시간의 여유와 자유로운 근무를 허용하고 있을 것이다. 노동개혁이 창조경제, 복지와 만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 될 것이다. 우선 노동시간이 축소되면 그만큼 청년을 위한 일자리는 더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이와 함께 창조경제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문화 콘텐트의 생산과 소비도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고 관련 서비스 산업의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경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성과는 대기업을 동원한 과시성 이벤트보다 국민이 스스로 창조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더욱이 과거처럼 우리보다 앞선 나라의 제품과 아이디어를 빠르게 수용하고 뒤쫓아가는 방식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벗어나 우리가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 콘텐트 생산을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창의적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올해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뤄낸 경제성장과 발전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논의가 많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의 국가가 됐다고 하지만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여전히 길고 국민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 역시 최하위권이다. 자살률 역시 몇 해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먹고살게 됐을지는 모르지만 국민 다수는 자신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제 발전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면 앞으로는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넘어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상황이 됐다.



 젊은 세대를 위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과제지만 노동개혁의 논의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일자리 창출과 함께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박 대통령이 중시하는 창조경제의 든든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도 노동시간 축소에 대해 사회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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