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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암살’ 안옥윤의 조국과 2015년 대한민국

중앙일보 2015.09.05 00:02 종합 27면 지면보기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우리는 그들이 꿈꿨던 나라를 만들었을까?’ 영화 ‘암살’의 마지막 회상 장면에서 춤을 추는 안옥윤과 그녀의 동료들을 보고 ‘그들도 청춘이었구나’고 되뇌며 울컥해서 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그들은 조국을 되찾고자 외롭게나마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그들이 “집에 가자!”고 외치며 당당하게 돌아오고 싶었던 조국이 맞는 것일까?

 우리 역사에서는 실현하지 못한 친일반역자를 처단하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나는 프랑스 개선문을 배경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군복 차림의 드골 사진과, 김포 비행장에서 몇몇 사람 사이에 홀로 꽃목걸이를 걸고 서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초라한 귀국 사진을 동시에 떠올렸다. 어찌 나뿐이었겠나. 돌이켜보면 이 두 장의 사진은 독일과 일본의 강제점령으로부터 각각 해방된 프랑스와 한국이 그 이후 걸어가게 될 미래를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반독일 항전을 주도한 레지스탕스가 정부를 구성한 프랑스와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임시정부가 소외당한 대한민국. 그 결과는 누구나 알듯이 프랑스는 과거와 단절했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과거와 단절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항상 듣는 변명대로 우리가 근대국가를 경영할 인재가 모자랐었건 또 다른 이유에서건 말이다. 청산했어야 할 과거는 진행형이 되었고, 현실에 순응해 과거를 수용하고 가난 탈피를 우선시했던 우리 세대에겐 부채로 남았다.
 
 안옥윤은 독립이 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만주에서는 집을 수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옥윤이 돌아가고자 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국민주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민주공화국일 것이다. 그리고 김구 주석의 소원처럼 경제력은 국민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국방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나라였을 것이다. 또한 그 나라의 청춘은 안옥윤의 바람처럼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희망의 미래를 설계하기를 꿈꿀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옥윤이 꿈꾸던 나라가 되었을까?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세계가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이루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안옥윤이 돌아오고 싶었던 조국은 아직도 멀리 있고, 가야 할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선출된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고 항변하며 원내대표직을 내던지는 장면과, 여전히 선거개입과 도청의혹을 받는 정보기관의 일탈행위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치체제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또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300여 명의 생명이 희생된 세월호 사건과 인터넷 정보에 의지해 국민 스스로 안전을 도모해야 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때 국가가 보여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인구 5000만 명에 1인당 소득 3만 달러에 근접한 한국의 경제력은 국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할 만하다. 그러나 가계부채가 1130조원을 넘은 것은 국가의 경제력이 서민가계와 무관함을 보여준다. 가계부채뿐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 여러 통계는 서민들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8개 조사 대상국 중 28위(2014년),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2012년), 근로자 3분의 1에 달하는 600만 비정규직은 OECD 평균의 두 배, 지니계수는 0.353으로 OECD국가 중 여섯 번째의 소득 불평등국(2012년) 등. 또한 1조원 이상을 가지고 있는 부자 중 상속자는 미국이 33%, 일본이 12%인 반면 한국은 84%일 정도로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현상도 서민들이 행복하기 어려운 사회임을 알려준다.

 미래는 어떨까?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서 지금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한 ‘오포세대’를 거쳐 꿈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칠포세대’로 불린다. 그래서일까? 소수라지만 젊은이들 사이에 헬(hell, 지옥)과 조선(망한 나라)을 합성한 ‘헬 조선(hell 朝鮮)’이란 용어가 떠돌고 있다. 그들 눈에 비친 한국은 지옥이고, 망해버린 조선과 같은 나라라는 것이다.

 정부와 기성세대는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는 동반성장 사회를 꼭 만들어야 한다. 그 길밖에는 없다. 청춘이 꿈과 희망을 잃을 때 나라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청춘들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수많은 이름 없는 안옥윤에 대한 후손들의 경의이고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 '‘암살’ 안윤옥의 조국과 2015년 대한민국' 제목의 '중앙시평'과 관련, (사)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1945년 11월 23일 여의도 비행장이 아닌 김포 비행장으로 환국했다”고 밝혀와 이를 바로잡습니다. 김구 주석의 꽃 목걸이 사진은 상하이 강만비행장의 사진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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