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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총재님, 어젯밤 죽을뻔 했시유” … 상기된 목소리로 JP에게 하소연했다

중앙일보 2015.09.04 01:45 종합 12면 지면보기
1980년 3월 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가운데)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고 있다. 왼쪽은 대장으로 진급한 백석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장 진급 한달 뒤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했고, 8월에는 대장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9년 10월 28일과 11월 6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언론을 통해 국민 앞에 등장했다. 10·26 이튿날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그는 계엄법에 따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의해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온 국민의 이목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 발표 내용에 집중됐다. 전투복 차림으로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전두환은 박 대통령 시해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단독 범행이라고 규정했다. 김재규가 10·26 저녁 박 대통령과의 만찬 때 시해 현장에서 50m 떨어진 별채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적시했지만 군부나 외세의 개입은 없었다고 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78> 전두환과 12·12
10월 28일 합수부 ‘시해 사건’ 발표
전두환 소장 역사의 전면에 등장
사람 좋은 정승화 총장 결단력 부족
신군부와 갈등 … 군 장악력에 균열
전두환 경질 주저하다 역습 당해



 합수부 발표로 10·26사건 전말은 정리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국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정치권에서도 그동안 감돌았던 의문과 억측이 풀렸으며, 사회적 불안도 가시게 됐다고 대체로 평가했다. 그러나 “군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에선 정승화 총장의 10·26 저녁 행적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공화당 총재인 나한테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군부 내에서 이른바 정승화 총장의 군부와 전두환의 신군부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이 번져 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같은 궁정동 울타리에 있던 정승화가 김재규의 저격 사실을 진짜 몰랐을까, 김재규와 차를 함께 타고 육본으로 이동한 뒤 그를 신속하게 체포하지 않은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전두환 쪽에서 제기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으로서 정승화 총장의 장악력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장태완 소장을 임명했다. 비육사 출신인 장태완(1950년 육군종합학교 졸업) 소장은 그와 경쟁 관계였고 정치색이 짙었던 전두환을 싫어했다. 정승화가 자기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전두환을 견제하기 위해 장태완을 중용했다는 전두환 측의 불만이 공화당에도 들려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12월 12일 저녁 나는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중식당에서 공화당 당직자, 의원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당 총재 취임 이후 각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돌아가며 만나는 자리였다. 한참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남산 너머 한남동 쪽에서 연달아 총소리가 났다는 정보를 접했다. 국회 업무와 관련해 옆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손달용 치안본부장(현재 경찰청장)이 갑자기 호출을 받고 나가면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그렇잖아도 10·26 이후 비상계엄이 지속되면서 내심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더구나 정치권에서는 12월 3일 어렵사리 발족한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도 특위 활동 시한을 둘러싸고 공화당과 신민당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난항에 빠진 터였다.



 한남동 상황을 알 만한 구자춘 내무장관은 아예 연락이 안 됐다. 저녁 식사 자리를 서둘러 파하고 나는 호텔 객실에 좀 더 머물며 바로 상황 파악에 집중했다. 비서진 한 명을 한남동에 보내기도 했다. 청구동 집에 돌아와서도 보좌진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했다. 나도 치안본부를 비롯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자정 가까이 돼서야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무장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날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1979년 9월 11일 역대 육군참모총장 간담회에 참석한 서종철(19대 육참총장) 대통령 안보특보, 노재현(20대) 국방장관, 정승화(22대) 육참총장, 김계원(18대) 비서실장(왼쪽부터). [중앙포토]
 이튿날 13일 아침 국회는 휴회 중이었지만 나는 여의도 의사당의 공화당 총재실에 나가 있었다. 마침 최규하 대통령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유신헌법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 최 대통령은 청와대로 이사하지 않고 삼청동 총리 관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수화기를 드니 최 대통령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뜸 “아. 총재님이십니까. 저, 어젯밤에 죽을 뻔했시유”라고 말했다. 뭔 소리인가 했다. 대통령이 죽을 뻔하다니….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됐다고 이런 말이 나오는가. 내가 “무슨 소립니까. 대체 어떤 놈이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까”라며 되물었다. 최 대통령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비롯해 장군 여러 명이 몰려와 결재해달라고 난리를 쳤다”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강원도 원주 사람도 말끝을 ‘~시유’로 끝내는지 최 대통령은 그날 밤의 두려움과 흥분을 억양이 이상한 충청도 말씨로 표현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날 밤 총리 공관에 전두환 본부장이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박희도 1공수여단장 등을 데리고 들어가 정승화 총장 체포를 대통령이 재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최 대통령은 군복을 입고 난데없이 등장한 이들 군부 실력자 앞에 엄청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전두환의 이런 무력시위는 항간의 소문처럼 그가 권총을 차고 들어와 최 대통령을 협박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최 대통령으로 하여금 ‘죽을 뻔했다’는 말을 남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전날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의 총격전은 전두환의 합수부에 배속된 헌병대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날 저녁 7시 전두환은 두 명의 대령(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을 육참총장 공관으로 보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내란 방조 용의자로 체포했다. 총격전은 이때 시작됐다. 정승화의 혐의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 궁정동 안가(安家) 만찬장 옆 별채에 머무르면서 김재규의 범행을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도왔다는 것이다.



 그 무렵은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12일은 정식으로 최 정권의 체제가 짜이던 때였다. 이날 오후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신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최규하 대통령이 요청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최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와 함께 구상한 조각 명단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었다.



12·12사태 당시 신군부 측이 동원한 탱크들이 중앙청 앞에 모여 있다. 당시 중앙청과 광화문 일대에는 탱크 대대 외에도 노태우 소장이 자신의 9사단 3개 연대 중 예비연대인 29보병연대를 출동시켰다.
 김영삼도 12일 신민당 총재로서 법적 지위가 원상회복됐다. 김영삼을 상대로 제기된 집무집행정치 가처분 신청이 취하된 것이다. 하루 전 신현확의 예방을 받았던 김영삼은 “군은 현재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을 확신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국회는 유신헌법을 대체할 헌법 개정 작업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12일 밤 전두환 본부장의 기습이 있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사람은 좋은데 결단력은 좀 부족했다. 그는 전두환이 지나치게 군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두환의 하나회에 대해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알면서도 묵인했었다. 하나회가 해로운 조직은 아니며 언젠가는 자신을 뒷받침할 세력이 되겠지 하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정 총장은 전두환 세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도 우유부단한 태도로 처신해서 화를 불렀다. 그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 총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경질하고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내야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인사 동향을 전두환이 알아내고 역습을 가한 것이다.



 12·12는 무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군사 반란이었다. 계엄하에서 합수본부장은 하루에 1~2회씩 계엄사령관을 만나 보고하고 지시받는 사령관의 핵심 부하다.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는 것 자체가 군 내 하극상이고 불법이다. 사령관을 체포해야 한다면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아야 한다. 전두환은 정승화 체포팀을 한남동 총장 공관에 보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은 삼청동 총리 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 대통령을 찾아갔다. 최 대통령은 절차 문제를 제기했다. 대통령한테 결재를 요청하기 전에 먼저 노재현 국방장관을 데려오라며 버틴 것이 통수권자의 품격을 지키려 했다고 평가해야 할지, 여러 상념이 떠오른다.



노 장관은 10시간 만에 최 대통령 앞에 나타났다. 최 대통령의 국정 구상은 크게 헝클어졌다. 당장 원래 12일로 예정된 조각 발표가 늦어졌다. 그사이에 유임시키기로 돼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물러나는 것으로 결정됐다. 계엄하 권력의 중추인 군부가 전두환 세력으로 재편됐고 최 대통령은 군부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군부 지휘관 중에 자신들의 임무를 엄정하게 처리한 간부는 하나도 없었다. 전두환의 위세에 눌렸다. 12·12는 총구(銃口)가 헌법적 권위를 뒤엎은 것이다. 권위가 저절로 권력인 건 아니다. 총구 권력을 확보하지 못한 허약한 권위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시대였다.



● 인물 소사전 장태완(1931~2010)=경북 칠곡 출신으로 1950년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 12·12 때 수도경비사령관(소장)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편에 서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마지막까지 맞서다 체포됐다. 보안사에 끌려가 3개월 만에 풀려난 뒤 강제 예편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재향군인회장, 16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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