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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의 개똥 경제학

중앙일보 2015.09.03 17:21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미국 공화당 대통령 선거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69)가 지난달 말에 외친 말이다. 그때까지 그의 입에선 주로 인종적·성적 편견이 가득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날 만은 예외였다. 미국인 가슴 속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자랑스러움에 호소하는 어휘로 말 문을 열었다.



그럴 만했다. 트럼프가 스스로 “가장 자신 있다”는 경제 공약을 제시한 날이었다. CNN 등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내년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먹고 사는 문제’를 꼽았다. 그날 트럼프가 ‘가장 자신 있고 뜨거운 관심사’를 다룬 셈이다.



그날 트럼프는 ‘경제계획 다섯가지(Economic Plan 5)’를 제시했다. 그는 “중산층 구제에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부자 증세 ▶기업 해외 도피 예방 ▶연방정부 부채한도 축소 ▶오바마케어 폐지 ▶관세부과(보호무역) 등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이름을 따 “내 경제공약을 ‘트럼프 솔루션’이라 부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좌우파 싱크탱크들이 모두 비판에 나섰다. 좌파 진영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CEPR)는 “트럼프가 (미국인의) 합리성보다는 격한 분노에 호소하는 정책을 발표했다”고 촌평했다. 우파쪽인‘성장을 위한 클럽(Club for Growth)’은 “트럼프는 정작 리버럴(미국식 좌파)을 가슴 떨리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역사적으로 드문 현상이다. 미 정치인의 경제공약 가운데 트럼프 정책처럼 좌우 양쪽의 비판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트럼프에겐 좌파 공격보다 우파의 지적이 더 아팠을까. 그는 '성장을 위한 클럽'에 격하게 반응했다. “도둑놈들 소굴(Pack of Thieves)”이라고 했다. 그가 경제 공약만은 격조있는 말로 발표하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셈이다.



논란이 거세지면서 트럼프 솔루션이 누구의 작품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경제 참모가 누구인지 아직까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전했다. 허핑턴포스트는 좀 더 색다른 관찰을 전했다. “트럼프 자신이 곧 경제 참모일 수 있다”며 “그의 경제 논리는 자신 머리에서 나온 트럼피즘(Trumpism)”이라고 했다.



과장은 아닌 듯하다. 트럼프는 『이젠 거칠어질 때(Time to Get Tough)』『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등 경제?경영 서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을 10권 이상 펴냈다. 포브스는 “트럼프 솔루션의 핵심은 선거캠프 참모들이 만든 게 아니라 『이젠 거칠어 질 때』의 내용 가운데 일부”라고 했다. 이 책이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젠 거칠어질 때』는 지난달 중순쯤에 출판됐다. 트럼프가 경제 공약을 발표하기 약 보름 전이다. 그는 책에다 “난 미국을 사랑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 슬프다. 우리는 모욕당하고 있다”고 썼다. 이 말에 적잖은 공감이 일고 있는 뜻하다.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 판매 순위에서 그의 책은 3일 현재 ‘정부 & 비즈니스’ 분야 1위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트럼프는 감성적 설득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재료로 중국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중국이 우리의 점심을 먹어치우고 있다. 미국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거칠게 공격했다. 또 미국의 이민정책과 자유무역협정(FTA)에서도 감정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최근 몇십년간 잘못된 무역협정을 맺고, 이민정책을 쓰는 바람에 중산층이 몰락했다”고 했다.



그의 경제논리가 분노를 바탕으로 한 만큼 ‘냉정함의 상징’인 시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기업 본사의 해외 이전을 “해외 도피”라고 불렀다. 시장 논리에 따라 이익이 좀 더 많이 날 것으로 보이는 본사 이전을 애국주의적 시각에서 비난했다. 그는 “관세를 올려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수입 자동차에 35%, 다른 수입물품에 29%, 미 기업이 해외에서 생산한 물품에 15% 관세를 물리겠다고 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추진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유무역을 통한 시장 확대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다른 나라에 보호무역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트럼프는 "난 자유무역주의자”라고 말했다.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그는 "월가 사람들이 미국 경제를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면 구체적으로 “칼 아이칸을 (재무장관에) 영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칸은 대표적인 행동주의 투자자이다.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아이칸은 기업을 사냥한 뒤 무자비한 구조조정을 단행해 미 중산층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인물이라는 게 미국 진보 진영의 시각이다. 트럼프가 최우선 가치로 주장한 중산층 복원과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경제논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톰슨로이터는 “트럼프 재산 효과일 수 있다”고 했다. 재산 40억 달러(약 4조7200억원)가 논리적으론 모순 투성인 그의 경제논리를 그럴싸한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그의 재산 대부분은 억만장자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시장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딘 베이커 CEPR 공동 소장은 최근 블로그을 통해 "트럼프처럼 상속재산을 바탕으로 억만장자가 된 인물은 눈에 보이는 경제 현상만을 바탕으로 경제논리를 구성하곤 한다"며 "이런 경제논리론 중산층 몰락 배후에 자신같은 인물이 있다는 점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 마디로 트럼프 논리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인물의 괴변이란 얘기다.



트럼프 정책에 대한 경제학자의 반응은 '그저 웃지요!'가 대부분이다.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경제학)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그의 경제정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평했다. 블라인더는 90년대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을 지낸 학자다. 헤지펀드 전문 매체인 알파는 “개똥 경제학(Mockery of Economics)처럼 들린다”고 보도했다.



그의 경제공약에 대한 가장 날 선 비판은 '80여년 전 역사의 그늘에 유폐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듯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바로 ‘대공황의 공포'다.



당시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재임기간 1928~32년)는 대공황 초기에 무너지는 실물 경제를 살리기 위해 관세를 올리는 방식으로 무역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무역장벽을 높였다.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경기 침체 국면에 교역이 더 줄었다. 세계 경제가 대공황의 늪으로 빨려들어갔다. 놀랍게도 후버는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며 대통령에 취임한 인물이었다.



트럼프도 같은 운명일 수 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돼 무역장벽을 쌓기 시작하면 교역이 줄면서 미국 등 모든 나라의 산업생산이 위축된다.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내세운 “중국, 멕시코 등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와 돈을 되찾아 오겠다”는 약속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블라인더 교수는 트럼프의 경제 논리나 정책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가 불가능한 일을 꿈꾸고 있다. 시계 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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