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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1인자에게 듣는다 <5>기러기 아빠 된 뒤 슬럼프 … 작년 구리 꺾고 마음 편해졌다

중앙일보 2015.09.03 00:56 종합 25면 지면보기
2000년대 1인자로 군림했던 이세돌 9단. 그는 “마흔 살까지는 후배들과 경쟁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이후의 삶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세돌(32) 9단은 건재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서구 외발산동 메이필드 호텔에서 열린 제27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그는 박정환 9단에게 207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이 대회 통산 네 번째 우승이다.


TV아시아선수권 우승 이세돌
1분 초읽기 이젠 자신 없어져 … 옛날엔 과감, 지금은 타협해
졌을 때 패배감 너무 쓰라려 다음 생엔 바둑 안 했으면

 결승전을 마치고 만난 이 9단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1995년 7월 2일 입단해 프로기사 경력만 만 20년이다. 그는 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승부사 이력의 후반전을 맞이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요즘 바둑에서 종종 실수가 나온다.



 “1분 초읽기에 자신이 없어졌다. 초속기는 감각으로 정신 없이 두면 되지만, 1분 초읽기는 1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나는 후배 기사들보다 1분에 대한 활용도가 떨어진다.”



 - 나이 탓인가.



 “그렇다. 나이가 드니 생각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바둑 내용도 많이 유해졌다. 승부에 대한 집착도 예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 나이가 들면 바둑에서 불리한 점은.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이는 건 좋은 점이다. 하지만 안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이 남는 게 문제다. 어렸을 때는 과감하게 두던 것도 나이가 들면 움츠러들어 포기한다. 요즘엔 60%의 성공 확률이 있어도 타협을 한다.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프로 생활 중 가장 기억 남는 것은.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 우승으로 처음 세계대회를 제패했을 때, 2003년 이창호 9단을 처음 이겼을 때, 지난해 구리 9단과의 10번기에서 이겼을 때다. 구리와의 10번기가 끝난 뒤는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 심리적으로 편해졌다.”



이세돌 9단(오른쪽)이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박정환 9단을 꺾고 우승했다.


 - 최근 들어 성적이 부진했다.



 “2013년이 극심한 슬럼프였다. 지난해는 구리 9단과의 10번기에서 이겼으니 불만은 없다. 올해는 아직 삼성화재배·몽백합배가 남아 있으니 끝나 봐야 알 것 같다.”



 - 슬럼프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내와 딸이 캐나다로 떠나면서 기러기 아빠가 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혼하고 가족이 생겼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니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렸다.”



 - 바둑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내 존재 자체다. ‘이세돌’ 하면 떠오르는 게 ‘바둑’이다.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바둑을 통해 많은 행복감을 느꼈다.”



 -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바둑을 취미로는 배우고 싶지만 프로기사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해봤으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 무엇보다 승부에서 졌을 때의 패배감이 너무 쓰라리다.”



 - 그런 패배감을 어떻게 극복하나.



 “소주를 마신다. 예전에는 집에서 마셨는데 지금은 주로 친구들과 마신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 정말 처량한 기분이 들어서다. 술 말고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 최근 압도적 1인자가 없다.



 “바둑계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동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서 단체 대 단체의 싸움이 됐다. 자연히 자신만의 수를 두기 어려워졌고, 압도적 1인자도 쉽게 나올 수 없는 구조가 됐다.”



 - 지금을 ‘춘추전국시대’라고들 한다.



 “당분간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기사들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 바둑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다 보니 그때마다 대회별로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가 우승하는 거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다.”



 - 개성이 없어진 건가.



 “그렇다. 예전에는 프로기사마다 구별되는 기풍이 있었고 독창적인 수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요즘 바둑은 그렇지 않다. 단체로 연구를 하고 결과를 공유하기 때문에 초반에 비슷한 모양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어졌다.”



 - 1인자가 나오기도 쉽지 않겠다.



 “아니다. 언젠가 시대의 천재가 나올 것이다. 지금은 바둑이 단체 싸움이라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지만, 이 시기가 정체되면 단체를 초월하는 1인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한국에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기대되는 후배는.



 “박정환 9단이 지금도 최고지만 이제부터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 뒤에는 신진서·신민준 3단이 있다. 특히 신민준은 요즘 바둑의 틀이 잡혀 가는 것 같아 흐뭇하다.”



 - 바둑의 틀이 잡혀 가다니.



 “정상급 기사들의 바둑을 보면 줄거리가 있다. 이에 비해 어린 선수들은 잘 두긴 하지만 두서가 없다. 상황마다 적합한 수를 두다 보니 전체 얼개가 엉성한 거다. 판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보여야 바둑의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 앞으로 목표는.



 “구리 9단과의 10번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리가 지난 6월 제6회 춘란배에서 우승했으니 이제 내 차례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이세돌 9단=1983년 전남 신안 출생. 1995년 입단. 2000·2002년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 . 2005년 바둑대상 승률상. 2006~2008·2010~2012년 바둑대상 최우수기사상. 연간 상금 역대 1위(2014년 14억1000만원), 통산 타이틀 획득 46회(국내 28회 세계 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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