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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해방·분단 70년, 우리는 다시 깨어나고 있나

중앙일보 2015.09.03 00:29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부영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조직위원장·전 국회의원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지난달 12~14일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국·일본·중국과 유럽 여러 나라 대표들이 참석해 더욱 빛을 발했다. 특히 주목 받은 건 국내 참석자들의 면면이다. 국회의장·대법원장·감사원장 등 각부 요인과 여야 정치인은 물론 전직 국무총리와 정치 원로, 보수·진보 쪽 문화예술인·대학교수·종교인·과학자들이 망라된, 그야말로 국민화합형 진용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해 무릎 꿇고 사죄한 장면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도 큰 감명을 주었다. 참회와 사죄에 인색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대조되면서 국내외에 반향을 일으켰다. 동시에 한·일 간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었다는 걸 확인하게 했다.



 회의에선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하토야마 전 총리의 제의로 ‘2015 동아시아 평화선언’이 채택됐다.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4가지 기본조건이 담겼는데, 이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아시아에서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본의 평화헌법 9조는 동아시아 평화의 근간이다. 모범적인 평화국가로 발전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일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다.



 둘째, 한국전쟁을 끝내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를 상상할 수 없다. 미국·중국·남북한 등 4개 교전 당사국은 휴전상태인 한국전쟁을 끝내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협상을 즉시 개시해야 한다.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상태는 한반도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고도화는 더 이상 방치돼선 안 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6자회담은 조속히 재개돼야 한다. 그러자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대화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북측의 핵 개발 동기를 약화시키고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비대칭적으로 우위에 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이 먼저 긴장완화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남북한의 긴밀한 대화와 협력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먼저 미국이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보장함으로써 북한의 비핵화를 용이하게 하고 상호 군축을 진행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에 상응해 북한과 남한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실현 약속을 구체화해야 한다. 일본·중국과 한국의 연안에서 가동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공동안전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절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넷째, 평화와 협력을 위해 시민사회와 여성의 역할을 높여야 한다. 평화선언에는 보수·진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들의 위기감이 배어 있다. 위협적으로 비축되고 있는 북핵 능력, 중국의 강대국 등장과 북핵을 빌미 삼아 추진되는 일본의 군사대국화 추세는 한국의 위상을 왜소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주변에서 높아가는 긴장은 방치한 채 세력경쟁에만 골몰하고 있다. 토론자로 나온 너지 데바 유럽의회 한반도관계위원회 대표와 요하나 플루크 전 독일연방의회 의원이 한목소리로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협상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미친 짓’이라고 혹평한 것도 이런 상황 인식에 대한 반영이다. 이들은 “한국이 평화협정 협상에 나서겠다면 함께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회의는 ‘한국의 힘’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도 됐다. 구한말이나 해방정국에서처럼 한국이 주변국들이 정해 놓은 대로 끌려가고 오는 나라가 아니라 주변국들과 협력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나서기에 손색이 없으며, 이를 주변국들에도 적극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보다 적극적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겠다는 주문이다. 그러려면 우선 남북 화해와 교류가 바탕이 돼야 한다.



 이의 실천을 위한 4개 항의 세부 내용 중 특히 한국과 일본의 평화-민주주의 연대가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가치이며 연대의 공고화를 통해 ‘과거사’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목이 울림을 준다.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 구상을 펴오고 있는 하토야마 전 총리가 제시한 ‘동아시아 평화회의’(가칭)가 민간기구로 자리 잡도록 노력한다는 합의가 나온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돼가고 있다. 8·25 남북 당국 간 합의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선 한반도 긴장완화와 중국의 역할에 대한 공감대가 모아졌다고 한다.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를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의 평화 없이는 남북 통일도, 번영도 기약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동시에 해방과 분단 70년을 맞아 “과연 우리는 다시 깨어나고 있나”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조직위원장·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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