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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국회의원이 재벌을 제압해?

중앙일보 2015.09.03 00:27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오랑캐로 오랑캐 치기’. 이이제이(以夷制夷)는 중화의 오랜 생존전략이었다. 이때의 두 오랑캐는 서로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뒤쪽의 ‘이’가 좀 더 나쁜 놈이다. 그래서 앞의 (덜 나쁜) ‘이’로 더 나쁜 뒤의 ‘이’를 제압하는 것이다. 둘 다 망해도 상관없다. 아니 둘 다 망하면 더 좋다. 하지만 철칙이 하나 있다. (더 나쁜) 뒤 오랑캐가 먼저 망해야 한다. 살아 있으면 더 지독하게 중화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앞 오랑캐가 압도적으로 이겨도 안 된다. 오랑캐는 누구나 중원의 비옥한 땅을 탐내므로.



 한창 시즌을 맞은 국정감사는 어떨까. 이이제이야말로 국민이 진짜 원하는 바다. 국회의원과 재벌, 둘을 오랑캐에 빗대보면 금세 안다. (듣는 국회의원과 재벌이 기분 나쁘겠지만 모른 척 무시하자) 누가 (더 나쁜) 오랑캐일까. 언뜻 보면 재벌이다. 과연 그런가. 국회는 ‘못된 짓을 했다’며 재벌 총수를 ‘묻지마 호출’ 중이다. 상임위마다 서슬이 퍼렇다. 하기야 땅콩 회항, 메르스 사태, 형제의 난…. 유난히 재벌 탓할 일이 많았다. 경기가 바닥이니 희생양을 찾는 정서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켜보는 국민은 기가 막힌다. 국민 입장에선 둘 다 오랑캐 못지않다. 어느 쪽이 더 못된 뒤 오랑캐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더 기막힌 건 이이제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한쪽 오랑캐(국회의원)가 시늉만 낼 뿐 애초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국민 모두 안다. 이이제이는커녕 오랑캐끼리 결탁해 나라를 거덜내지만 않아도 감지덕지다.



 국회의원이 재벌 총수를 무조건 불러내는 데는 대개 딴 뜻이 있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당신네 총수를 국감에 부르겠다”고 통보하면 대기업 담당자는 즉시 달려와 “뭘 해드리면 됩니까” 묻는다. 이런 수법은 식상한 고전에 속한다. 비리나 잘못을 저지른 재벌 입장에서도 이렇게 처리하는 게 싸다. 구조개혁이나 투명 경영, 사회적 책임 같은 걸 해내려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니 국회의원과 재벌, 둘 중 어느 하나가 망하기는커녕 둘 다 윈윈하는 것이다. 해마다 레퍼토리와 대상만 조금 바뀔 뿐 국회의 총수 망신 주기 호출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올해는 유난히 총수 호출이 많다. 산업통상자원위는 무려 150여 명의 기업인을 증인·참고인으로 거명했다. 기획재정·산업통상자원·정무·국토·환경노동·법사위까지 6곳에서 총수를 불러대는 통에 롯데는 발등의 불이다. 그룹 인사며 경영, 투자는 국감 후로 미뤘다. 임원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의원회관을 찾는 게 일이다. 하루 서너 시간 쪽잠은 기본이다. 의원 관심사는 물론 보좌관 한 사람 한 사람 신상명세까지 꿰야 한다. 그래야 총수 출석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어디 롯데뿐이랴. 요즘 국회는 대기업 관계자들로 북새통이다. 출입증 발급에 평소 2~3배의 시간이 걸릴 정도다. 한 재벌 관계자는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총수의 출석 시간이 달라진다”며 “열심히 눈도장을 찍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나. 우선 국회가 삼가야 한다. 무조건 총수를 불러 하루 종일 대기시킨 뒤→고함치고 윽박지른 후→하나마나 1분 답변으로 끝나는 ‘재벌 혼내주기 코스프레’부터 뿌리뽑아야 한다. 재벌 총수도 달라져야 한다. 맞을 매를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S재벌은 30초로 타협했다는데 나는 왜 두 시간이냐”며 부하 직원들을 쫘서도 안 된다. 창피 좀 당하면 어떤가. 국민 앞에 고개 좀 숙이면 어떤가. 맞을 매를 안 맞으려고 그룹 전체가 국회의원에게 통사정, 매달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총수가 당당해야 기업 경영이 왜곡되지 않는다.



 한국 경제는 지금 내우외환,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기업가 정신 없이는 한 발자국도 헤쳐 나가기 어렵다. 그런데도 일 년 중 두 달은 국회가 앞장서 기업가 정신을 죽이고 있다. 하도 답답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꿈도 꿔본다. 국회는 꼭 불러낼 재벌만 불러내고, 총수는 의연하게 사과하고 고치는 국정감사. 이런 게 진짜 이이제이 아닌가. 그래야 국민도 조금은 살맛 날 것 아닌가.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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