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인 속내 까발린 트럼프 스타일, 보잉 757 타고 고공 행진

중앙일보 2015.08.30 16:48
도널드 트럼프 [사진 중앙포토]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의 한 미식축구 경기장.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유세를 기다리던 3만여명의 청중 사이에서 갑자기 환호가 터져 나왔다. 축구장 상공을 선회하는 트럼프의 대형 보잉 757 전용기를 쳐다보고서다. 이 장면은 유튜브 곳곳에 동영상으로 올랐다. 지난 4월 출마 선언 후 밴을 타고 길바닥을 달리며 ‘서민 유세’를 벌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가장 취약한 계층이 우리 사회의 전면에 놓여야 한다”며 서민 후보임을 내세운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두 후보는 서민 대신 불법 이민자를 이슈로 만든 트럼프의 보잉기 유세에 위기를 맞았다.



갑부임을 과시하고, 품위는 팽개치며,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트럼프 스타일’ 이 미국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트럼프 돌풍에 부시 전 주지사는 군소 후보로 밀렸다. 클린턴 전 장관은 트럼프 바람에 숨어 있는 ‘반(反) 워싱턴 정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국무장관 시절 관용 e메일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논란까지 겹치며 그간 변방에 있었던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출마를 고심하는 조 바이든 부통령에게서 위협받는 처지가 됐다. 대세론의 소멸이다.



퀴니팩대의 지난 27일 여론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클린턴 전 장관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부시 전 주지사와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등 공화당 선두 그룹을 한자리수 지지율로 주저 앉혔다. 공화당 지지층 조사에서 트럼프는 지지율 28%로 선두를 질주했고, 부시 전 주지사와 루비오 상원의원은 7%로 밀렸다. 특히 트럼프의 지지율은 공화당 골수표에서 1등이다. 극보수인 티 파티 응답자의 25%, 백인 복음주의자의 24%, ‘매우 보수’ 응답자의 25%가 트럼프를 선택해 이들 그룹에서 모두 1위다. 그는 공화당 성향의 여성 응답자에게서조차 25%를 얻어 1위를 지켰다.



클린턴 전 장관과의 양자 대결에서도 지난 5월 클린턴 50% 대 트럼프 32%로 크게 뒤졌다가 7월에 48% 대 36%로 격차를 좁히더니 한달 만에 45% 대 41%로 4% 포인트 차이로 따라 붙었다. 이번 여론조사에선 트럼프 고정표가 등장하는 징후까지 엿보인다. 클린턴ㆍ부시ㆍ트럼프가 3자 대결에 나설 경우 각각 40% 대 24% 대 24%로, 트럼프는 제3후보로 독자 출마해도 부시 전 주지사와 맞먹는 득표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클린턴 전 장관은 민주당 지지층에서 계속 추락하고 있다. 지난 7월 55%를 얻었다가 한달 만에 45%로 크게 떨어졌다. 같은 기간 샌더스 상원의원은 17%에서 22%로 상승했고, 출마가 임박했다는 바이든 부통령이 새롭게 18%를 차지했다.



미국 대선판을 뒤집어 놓은 트럼프 돌풍은 그 동안 상식으로 여겨졌던 기존 선거 공식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불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선의 최고 키워드는 서민과 중산층이다. 클린턴 전 장관이 ‘보통 미국인의 대변자’를 구호로 내걸었고, 부시 전 주지사까지 ‘취약 계층’을 강조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정반대다. 클린턴 전 장관이 지난 4월 밴을 타고 찾아갔던 아이오와주를 트럼프는 지난 15일 ‘헬기의 벤틀리’인 82억원짜리 시콜스키를 타고 갔다. 그의 전용 헬기다. 트럼프는 이날 즉석에서 어린이들을 헬기에 태우는 쇼를 했다. 전날 트럼프가 탔던 보잉 757은 2011년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에게서 1억 달러를 주고 사들인 것이다. 승객 228명을 태우는 이 여객기를 트럼프는 43 인용 전용기로 개조해 안전벨트 등을 순금으로 도금했다. 지난 6월 출마 선언 때 “나는 순재산이 8억 달러(9400억여원)”라고 자랑했던 트럼프의 갑부 마케팅은 ‘강한 리더십’을 갈망하던 공화당 지지층을 끌어모았다.



트럼프 돌풍을 만든 또 다른 동력은 백인 사회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배설 캠페인에 있다. 멕시코인 불법이민자를 “성폭행범”으로 비난하고, “아시아인은 인사말이 없다”며 아시아인들의 서툰 영어 발음을 조롱한 트럼프. 그는 중국을 놓곤 “위안화 평가 절하는 미국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엔 안온한 백인 커뮤니티에 스며드는 히스패닉에 대한 언짢음과 초강대국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담겼다. 버지니아주 의회의 마크 김 주 하원의원(민주당)은 “백인 주류 사회가 자기들끼리 있을 때 은밀히 나눠왔던 대화를 대놓고 공개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한 레즈비언 여성 코미디언에 대해 “뚱뚱한 돼지”로 인신 모독을 하며 보수 백인 사회가 동성애자에 대해 갖고 있던 노골적인 혐오감을 대변했다. 그간 소수 인종, 동성애자, 여성 등을 거론할 때 차별이나 모욕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정치적 차별 금지(political correctness)’는 미국 정치인의 덕목이었지만 트럼프는 이를 깨버렸다. 그러나 보수 백인 사회는 이를 놓고 ‘막말’이 아니라 ‘할 말’을 했다고 환호하며 트럼프 지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트럼프의 선거 공식 파괴는 워싱턴 정치가 금과옥조로 여겨온 품위 파괴에도 있다. 반듯한 정치인이 아니라 비뚤어진 반항아 스타일로 오히려 워싱턴 정치에 신물을 느낀 유권자를 흡수한다. 트럼프의 정치권 융단 폭격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클린턴 전 장관을 놓곤 트위터에 “남편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뭐로 미국을 만족시키겠나”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진보와 중도세력은 트럼프의 막말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어 그가 대선 본선에서는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