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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가 엄격? 청승맞게 질질 끌어 봐

중앙선데이 2015.08.30 04:24 442호 27면 지면보기

구 독일 마르크화의 클라라 슈만.



2009년에 참가했던 밴 클라이번 콩쿠르의 준결선에서는 타카치 콰르텟과 피아노 5중주곡을 하나 연주해야 하는 실내악 라운드가 있었다. 당시 내가 선택한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 F단조’, 몇 번을 연주한 건지 셀 수도 없을만큼 내겐 더없이 익숙한 곡이었다. 날선 자태가 이를 데 없이 꼿꼿하지만 그 안에 특유의 고독이 살아 숨쉬는 이 곡을 음반으로만 들어오던 타카치 콰르텟과 함께 연주하게 된다니.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음악의 고정관념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2악장을 시작했을 때였다. 제2 바이올린 주자 카로이 슈란츠가 내게 말했다. “음, 정말정말 좋은데 말야. 너의 그 주제선율이 뭐랄까…. 음, 다소 객관적인 느낌으로 들려.” 아! 내가 지나치게 관조적이고 거리감 있게 느껴진다는 얘긴가? 좀 더 주관적이게, 내 얘기처럼 연주하라는 말인가?



다시 시작해 보았다. “훨씬 좋은 것 같아!” 제1 바이올린 주자인 에드워드 듀슨베리가 거들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근데 뭐랄까. 좀 더 많이 표현해 보면 어떨까?” 여기 보면 ‘에스프레시보(espressivo, 더욱 표현적으로)’도 있고. 너무 겁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내가 좀 소심하게 들린다는 얘긴가? 한발짝 확 나아간듯한 느낌으로 다시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카로이가 악기를 무릎에 내려놓으며 이러는 거다. “음, 네가 우리 얘기를 잘 못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더 부드럽고, 더 청승맞고, 더 질질 끄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부드럽고, 청승맞고, 질질 끄는 느낌? 브람스를? 놀란 내가 에둘러 설명했다. “음, 그런데 나는 이게 훨씬 각지고 구조미가 돋보이는 곡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바로 그거야. 너가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 많은 사람들이 브람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너는 특히 독일에서 왔으니 더 잘 알 거야. 그 의견도 물론 절대로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반대로 한번 생각해봐. 이를 테면, 그와 클라라의 관계를 봐봐. 브람스는 그녀에게서 더 가까워짐도 더 멀어짐도 없이 몇십년을 좋아했어. 그런 브람스의 음악이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는 건 무슨 근거에서일까? 너는 진심으로 이 악장이 딱딱한 독일음악이라고 생각하니? 그보다는 그저 달콤한 사랑노래 같지 않니?”

헝가리 출신의 타카치 콰르텟.



엥? 생각해보니 과연 희한했다. 브람스는 언제부터 내게 딱딱하고 엄격하고 치열하고 고고한 작곡가로 인식되었을까? 실제로 그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지시어들은 ‘돌체(dolce, 부드럽게 또는 달콤하게)’ 소토 보체(sotto voce, 작은 목소리로)’, ‘소스테누토(sostenuto, 늘어져서)’. 막상 브람스 본인은 카로이가 말한 것처럼 부드럽고 청승맞고 질질 끄는 듯한 표현력을 요구한 것 같은데. 결국 지난 20년간 가지고 있던 브람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내려놓고 멜로드라마의 주제가 같은 소리로 첫마디를 시작했다. 네 명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거야!!!”



고정관념이란 언제나 무섭다. 더 깊이 볼 수 있는 눈을 가려서만이 아니다. 더 쉽게 생각할 기회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몇년 전 폴란드에서 첼리스트 아르토 노라스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5번 D장조’를 연주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그와의 첫 리허설에 들어갔다. 특히나 더 설렜던 이유는 그가 지난 몇십년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핫한 첼로 교수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나는 늘 베토벤이 어렵게 느껴져 절절 매는 대표적인 1인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을지 기대에 부푸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곡을 한번 쭉 훑고는 마치 레슨 받으러 온 학생처럼 눈을 초롱초롱 밝히는 나에게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나한테 뭔가 해줄 말이 없니?” 당황한 내가 대답했다. “네? 음….” “피아니스트들은 베토벤을 잘 알잖니. 소나타가 무려 서른 두 개나 있고. 협주곡도 다섯 개나 되고. 그 외에도 작품이 너무나 많잖아. 겨우 소나타 다섯 개 밖에 공부하지 못하는 우리 첼리스트가 베토벤을 얼마나 알 수 있겠니? 현악 사중주와 다른 실내악곡을 아무리 다 합쳐도 우리가 피아니스트만큼 베토벤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지 않니?”



70대 거장의 발언으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그가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이 곡 같은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엔 큰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아. 그는 이제 완벽하게 확신에 차 있고, 더 이상 무엇을 크게 고민하지도 않지. 사람들은 그의 후기 작품들에 대해 엄청나게 장황하고 철학적인 해설을 갖다 붙이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넌 어떠니?”



“음 저는…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세 개를 정말 사랑하는데, 그 작품들은 바로 앞에 지은 ‘함머클라비어’나 조금 후에 지은 이 작품, 또는 ‘그로스 푸가’ 등과는 또 다른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러니 말야. 피아니스트들은 그의 인생 궤적을 훨씬 더 상세히 볼 수 있는 거지. 너는 피아노 소나타를 몇 개나 공부했니?” “한 3분의 2는 했어요.” “와. 그렇다면 진짜로 너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겠는걸?!”



그가 하는 말들이 모두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 손녀딸만큼 어린 나에게 그토록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한편의 값진 레슨이었다. 그러나 늘 겁나기만 했던 베토벤을 그토록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끼게 해준 그 솜씨야말로 과연 명장의 솜씨였다.



온갖 범세계적이고 초우주적인 해설을 갖다 붙히는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을 그토록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도 과연 또 있었을까? 때때로 누군가의 세계를 과감히 깨부수는 또 다른 누군가의 한마디는, 얼마나 멋진지.



손열음?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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