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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조훈현 보고 싶어 술병만 들고 비행기 탄 후지사와 슈코

중앙선데이 2015.08.30 04:21 442호 26면 지면보기

후지사와(왼쪽)의 은퇴 기념 대국은 아끼던 조훈현과 두었다. 서 있는 사람은 린하이펑 9단. [일본기원]



1981년 일본 기성전(棋聖戰)을 방어한 직후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1925~2009) 9단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다음에 도전해올 이는 오타케(大竹英雄)와 가토(加藤正夫)일 것이다. 기성의 자리는 양도할 수 없다. 특히 가토에게는 지는 방법을 바르게 인도해줄 필요가 있다.” 오타케 히데오와 가토 마사오는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의 문하생들. 이후 번갈아 도전해오자 큰소리쳤다. “한 명씩 오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라.” 그는 조치훈이 83년 제7기 기성전 도전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큰소리쳤다. “바둑에는 계산도 할 수 없고 끝까지 수를 읽어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런 데서 싸운다. 큰소리 같지만 치훈군과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싸운다.” “바둑사에 독창적인 수(手)를 하나만 남길 수 있어도 기사로서 만족한다”던 후지사와는 술·경마·경륜 등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인생을 불태웠다.   아버지 등에 업혀서부터 바둑 접해 어릴 적 이름은 다모쓰(保). 씨름꾼이었던 부친은 바둑이 3단, 장기가 5단이었다. 수완 좋고 돈도 잘 벌었다. 할아버지가 “바둑만은 두지 말라”고 했지만 부친은 어린 슈코를 등에 업은 채 내기바둑을 두었다. 부친은 슈코를 기사로 만들고자 아홉 살에 일본기원 원생으로 넣었다. “학교는 연일 결석하게 되었다. 의무교육이었으나 태평스러운 시대였다.” 1939년 열네 살에 입단했다. 입단한 지 얼마 안 돼 술을 마셨다. 혼인보 세키야마 리이치(關山利一) 7단이 대작할 사람이 없자 술을 줬다. “자네도 이젠 초단이야. 초단이란 성인이 됐다는 뜻이야. 자, 허락할 테니 한잔 해. 단, 아직 어리니까 석 잔만 해.” 본격적으로 마시게 된 것은 서른이 지나면서부터다. 45년 8월 부친을 잃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바둑에 매진했다. 48년 도쿄에서 하숙하면서부터 더욱 열중했다. 철학과 경제학 서적도 탐독하고 ‘위기(圍棋)신문’을 발행하는 등 이것저것 편력도 했다. 신문은 2호로 폐간됐다. 그때까지는 성실했다. 취미는 독서 정도였다. 서른 넘어 술에 걸려들었다. 매일 마셨다. 새벽에 여기저기 전화하는 버릇이 있었고 길에서 자다가 유치장에도 들어갔다. 여자에 대한 소문도 많았다. 고급 바의 여자가 아니라 신주쿠(新宿) 핑크살롱의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80년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의 도전을 받아 기성전을 4승 1패로 이긴 후 니혼TV의 ‘기성전 격돌의 보(譜’)에 출연했다. 여자 아나운서에게 실수를 했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는 예쁘군요.” 술이 덜 깬 상태로 출연한 탓이다. 75년 대중탕에서 목욕하다가 친구와 금주를 맹세했다. 곧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히라스카(平塚)위장병원에 입원했다. 1주일 후 쫓겨났다. “선생은 고장난 데가 하나도 없소.”   술에 절어 살다가도 대국전엔 단주 30대엔 아무리 마셔도 다음 날 대국에 지장이 없었다. 매일 위스키 한 병만으론 부족했다. 40대에 들어서자 전날의 술이 힘겹기 시작했고, 대국 전엔 술을 끊었다. 단주(斷酒)할 때엔 2~3일 간 식은땀이 심해 하룻밤에 잠옷을 세 번 갈아입었다. 단주 기간이 1주일, 2주일로 늘어났다. “의지와의 싸움인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둑을 가장 사랑하는 증거다.” 주변에서 “비상한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지, 저렇게 먹고 마시고 해도 성적이 좋으니 말이야” 하고 말하면 정색을 했다. “다들 모르는 소리. 난 술도 여자도 경륜도 경마도 다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바둑이야.” 집중력과 의지가 끔찍했다. 78년 1700만 엔의 상금이 걸린 제1기 기성전 때다. 그는 우승 후보에도 끼지 못했다. 하지만 술을 딱 끊고 집중해 타이틀을 따냈다. 경륜과 경마로 불어난 빚 탓에 돈이 필요했다. ‘일본기원의 빚쟁이’였지만 신용이 좋았다. 대신, 우승한 날 대국장 밖엔 빚쟁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이틀 획득 수는 22회. 도전기에 나간 기록은 23회. 그러니 결승에 올랐다 하면 타이틀을 땄다. 대신 방어는 못했다. 기성전 우승 때도 1년 성적은 7승 12패. 집중을 지속할 체질은 아니었다. 하긴 그렇다. 집중과 지속은 상충된다. 1년에 한 번만 집중하기도 했다. 바로 최고의 상금이 걸린 기성전. 6연패 했는데 큰소리쳤다. “1년에 네 판만 이기겠다.” 기성전은 7번 승부. 네 판만 이기면 된다. 79년 술만 마시던 무렵엔 체중이 50kg이었다. 술을 끊고 준비를 하자 75kg. 2개월 반 7번 승부를 끝내자 60kg. 보통 한 판에 3kg이 준다.  

1 대국 중 생각에 잠긴 후지사와.


[반상(盤上)의 향기] 분방함과 절제의 기사

결단력과 두둑한 배포의 소유자 부동산업, 바둑교실 등 사업도 여럿 해봤지만 다 말아먹었다. 그래도 안목과 수완은 담대했다. 57년경 일본기원의 기구가 커지면서 재정난이 뚜렷해졌다. 명인전을 개최해 난국을 타개하자고 뒷공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명인전은 일본기원으로서는 최후의 재산이었다. 물론 78년에 이르러선 ‘기성’이라는 이름도 팔아먹었지만 말이다. 팔 곳은 최종적으로 두 신문사밖에 없었다. 요미우리와 아사히. 60년 아사히신문 주최 제5기 최고위전에서 우승한 후지사와는 인사차 신문사를 찾아갔다. 당시 후지사와는 일본기원의 섭외담당 이사였다. 신문사와 이야기가 잘 풀렸다. 하지만 얼마 후 전무가 바뀌었다. 그는 요미우리를 찾아가 담판했다. 명인전을 요미우리에 넘긴 일은 즉시 기사들에게 전해졌다. 계약 과정에 불만이 있어 기사총회 날엔 논란이 예상됐다. 거의 모든 기사가 모인 총회장엔 긴박한 공기가 감돌았다. 후지사와는 천천히 일어서서 말했다. “명인전을 요미우리에 4000만 엔에 주기로 했습니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금액에 모두가 기절할 듯 놀랐던 것이다. 후지사와의 언동은 일급 배우 그대로였다고 전한다.  

2 후지사와 은퇴식 장면. 기념 휘호를 선물하고 있는 천쭈더(陳祖德) 중국기원 원장(사진 가운데). 오른 쪽 끝에 후지사와가 서 있다. [일본기원]



“잘 때도 바둑 생각하라” 후배 가르쳐 그는 자랑할 만한 바둑판을 갖고 있었다. 우리 돈으로 5000원 짜리다. “월간 위기(圍棋)구락부의 화보 ‘나의 바둑판 자랑’에도 나왔다. 널빤지로 만든 판에 유리로 만든 돌을 쓴, 조잡한 제품이다. 하도 많이 두들겨 줄이 잘 안 보일 정도. 하지만 나의 자랑거리로서 이 판을 가지고 린하이펑(林海峰)과 가토, 다케미야(武宮正樹), 훈현, 치훈 등 젊은이들을 열심히 단련시켜 왔다. 수 천 판의 역사와 정열이 이 바둑판에 새겨져 있다.” 한 판에 한 점 ‘치수 고치기’는 연습에서 하는 일. 하루는 조훈현이 넉 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후지사와가 조훈현에게 두 점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경계를 터놓고 후배와 공부했다. 누군가 물었다. “후배들을 왜 가르치지? 그들이 세지면 정작 승부에선 힘들 텐데.” 답했다. “세지면 그만큼 바둑판 위에서 멋진 예술을 창조할 수 있지 않아?” 도쿄 요요기(代代木)역 앞 빌딩에 사무실이 있을 때다. 아베 요시테루(安倍吉輝) 8단과 조치훈 8단이 놀러 왔다가 술을 마시고 소파에 잠들어 있던 후지사와를 기다렸다. 깨어나자 조치훈이 말했다. “과연 선생님이군요.” 잠꼬대를 했는데 그 내용이 바둑이었다. 78년 여름 김포공항. 술이 얼근한 후지사와가 나타났다. 입국심사관이 방문 목적을 묻자 첫 마디가 “꾼겐(훈현)이 보고 싶어 왔어.” 조니워커 블랙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였다. 와이셔츠 차림에 가방도 없었다. 어수룩했다. 그는 48시간을 호텔에서만 지냈다. 조훈현이 서울 시내 관광을 모시자 10분 만에 “에이, 시시하다”며 다시 호텔로 택시를 돌렸다. 중앙일보 기자가 찾아와 대국을 부탁했지만 조훈현과 바둑 얘기만 했고 조니워커 블랙과 시바스 리갈을 실컷 마셨다. 헤어질 때 조훈현에게 당부했다. “잘 들어. 잠이 들어도 바둑을 잊어선 안 돼. 공부를 안 하면 내가 때려줄 테다.” 조훈현의 스승이었다.   조훈현 “스승에겐 유용한 악수 많다”

기보 이시다가 둔 백1에 대해 후지사와의 흑2가 54분 만의 결단이다.



바둑은 초반의 상징성이 강하기에 독창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불안한 전쟁터라 큰 안목과 대범함이 없다면 승부 속에 갇힌다. 후지사와는 말했다. “나이 25세에 공부를 끝냈다. 50 넘어서 개안했다.”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스케일이 컸고 비범했다. “바둑사에 독창적인 수를 하나만 남길 수 있어도 기사로서 만족한다.” 독창적인 수, 그것도 바둑사에 남을 만한 수를 열망하는 인간에게 세상은 좁다. 정신의 넓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공간. 그런 공간은 깨지든지 넓어지든지 해야만 한다. 기보는 80년 제3기 기성전의 한 판. “광대무변이야, 광대무변.” 그리 중얼거리면서 장고 54분 만에 흑2를 두드렸다. 정석은 흑2가 아니라 A인데, 그러면 백B로 우변 흑이 깨진다. 흑2 이후 백a에는 흑b~흑f까지 아낌없이 버린다. 중앙을 얻는다. 바둑사에 남을 담대한 착상이요, 결단이었다. 스스로 돌아봤다. “작품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바둑은 분방한 가운데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이런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바둑꾼이 한 명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조치훈이 이해했다. “슈코 선생에게는 유용한 악수가 많다.” 83년 6연패 기성을 조치훈에게 빼앗긴 후 위장을 수술했다. 임파선암 등 힘든 투병도 있어 다들 그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했다. 하지만 91년 39기 왕좌전에서 우승했다. 나이 66세. “예(藝)에 의해 승부가 생겨난다. 승패는 결과에 불과하다. 나는 바둑에 임하는 자세가 전부다.” 그는 “바둑 두는 상대를 공경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국후 감상은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말하기를 “마음의 포석을 생각해야 한다.” 감상이 늘어지면 스스로 갇힌다. 만년에는 서예에 몰입해 개인전도 열었다. 그가 좋아하는 글귀는 뢰(磊). 큰 돌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는 형상. 쌓여 있어도 좋고 우르르 굴러떨어진다면 그 또한 장관이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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