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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1968)

중앙선데이 2015.08.30 04:00 442호 24면 지면보기

3 ‘얼굴들’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뭔가 되려 발버둥치지만 제자리 얼굴 통해 동시대의 영혼 응시

영화사 중역인 리처드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크게 싸우고 난 뒤 각기 다른 남녀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마리아는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지난밤 동침했던 체트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하고, 애인인 창녀 지니와 밤을 보내고 돌아온 리처드에게 불륜의 현장을 들킨다. 물어뜯으며 싸울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일순간 침묵하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데….



존 카사베츠 감독의 ‘얼굴들’은 제목처럼 얼굴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다. 그러나 인물들의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분노와 무심함 사이, 농담과 진지함 사이에 영화 속 얼굴과 언어가 머물러 있다. 회사 중역이자 중년 남자인 리처드는 친구 프레디와 함께 지니의 집으로 향한다. 지니의 직업은 매춘부다. 세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리처드와 지니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프레디가 흥을 깨 버린다. “그런데 우리 얼마지?” 판을 깨지 말라는 지니의 말에 그는 “난 그냥 당신이 얼마를 청구하는지 알고 싶은 거야”라고 응대한다. ‘얼굴들’은 196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집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아내 마리아와 대화를 하던 중 프레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리아는 그가 바람을 피우고 있으며, 좋은 아빠는 아니며, 성적 공포를 지닌 중년 남자라고 흉을 본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던 리처드는 “남자들은 모두 넘겨주게 될 거야. 여자들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 집도, 차도, 사무실도. 우린 집에 앉아서 웃을 뿐이지. 그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하며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 그는 아내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던지고 나서는 지니에게 전화를 건다. 관객들은 그의 반응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1 리처드 역의 존 말리는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가공된 진실에서 관객 벗어나게 의도 카사베츠의 ‘얼굴들’은 정교한 드라마가 아니다. 명쾌한 설명이나 결론보다는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키고, 사건을 ‘지연’시킨다. 인물들이 꽤 즉흥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탓에 당장에라도 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 사태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영화는 직접적이기는 하되 직설적으로 보여 주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자주 인물들의 상황을 관찰하고 응시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영화 만들기의 태도였다.



메소드 연기로 50년대에 명성을 얻었던 배우 카사베츠는 59년에 감독 데뷔작 ‘그림자들’을 선보인 후 메이저 감독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60년대 초반에 만든 두 편의 영화는 잊힌 작품이 되어 버렸다. ‘얼굴들’은 지인들과 함께 중고 카메라를 사들이고 장모의 집을 빌려 6개월간 촬영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은 당시의 제작 관행과는 다른 수공업적 영화 만들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속기법식의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 영화는 관객들과 경쟁하면서 그들을 앞지르려고 노력한다. 나는 관객들의 틀을 깨뜨리고 싶다. 나는 관객을 뒤흔들어 놓고 가공된 안이한 진실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고 싶다.”



‘얼굴들’은 주인공 리처드가 회사 중역들과 함께 시사회에 참석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그가 경험했던 영화사의 중산계급을 비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사베츠가 한 발 더 카메라를 들이댄 것은 인물들이 지닌 황폐함이다. 무엇인가 되어보려고 발버둥치지만 이야기는 마치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처럼 공간과 상황들을 맴돌며 반복되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동은 인물들의 히스테리컬한 분노나, 시니컬한 농담이나, 우발적인 선택에 들어있지 않다. 바로 동시대의 살아있는 인간들의 욕망 그 자체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던 태도에 있다.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이 바뀔 때마다 문득문득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본 듯한 착각이 든다. 그것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화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즉흥성?현장성의 힘으로 직관하는 영화 ‘얼굴들’의 리처드와 마리아는 각자의 하룻밤을 보낸 후 계단에 앉아 담배를 나눠 핀다. 그들이 뿜어내는 연기처럼 공허한 기운이 화면 안에 가득하다. 그것은 이들 부부의 삶이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탄식하는 현실적 화면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개입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절대로 그들의 내면을 담지 않으려고 애쓴다.”



‘얼굴들’은 짜인 영화가 아니라 즉흥성과 현장성의 힘으로 직관하는 영화였다. 이 작품은 60년대를 넘어가는 미국 영화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20만 달러 남짓의 제작비로 홈 무비를 만들어가듯 쌓아올린 장면들은 카사베츠를 미국 영화 산업의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새로운 출발은 미국 독립영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구스 반 산트, 아벨 페라라, 스파이크 리, 데이비드 린치, 코엔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폴 토머스 앤더슨, 짐 자무시 등의 이름은 카사베츠와 함께 피어난 미국 영화의 새로운 얼굴이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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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밖으로] 사랑을 부르는 ‘얼굴 vs 말’의 대화 참된 관계는 비대칭에서 시작

2 존 카사베츠 감독



“얼굴과 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얼굴은 말한다.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말을 시작하는 것이 얼굴이다. 그 점에서 얼굴은 말한다. (…) 참된 관계란 바로 말이다. 그 말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응답이요 책임이다.”



?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에 등장하는 레비나스의 이야기는 얼굴과 말을 더 깊이 숙고하려는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이다.



얼핏 난해해 보이지만 사례 하나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길가에 앉아 있는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아니 정확히 말해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이다. 응당 나는 소년에게 묻는다. “애야, 무슨 일이니?” 이 상황에서 “애야, 무슨 일이니?”라는 나의 질문은 나와 소년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소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으리라는 점을. 그렇기에 나의 질문은 사실 두 번째 말이고, 첫 번째 말은 바로 울먹일 듯한 소년의 얼굴이었던 셈이다. 레비나스가 “얼굴은 말한다”고 말했던 지점이다.

4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적 동료인 지나 롤랜즈(지니 역) [사진 마티]



서로의 얼굴을 읽으려 하지 않는 부부 물론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만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얘야, 무슨 일이니?”라는 나의 말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관계란 ‘말’이다”라고 레비나스가 말했을 때, 여기에서 ‘말’은 내가 소년에게 던진 말, 즉 “얘야, 무슨 일이니?”라는 말을 의미했던 것이다.



원초적 관계, 혹은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참된 관계’에 관해 생각해볼까? 타인의 얼굴과 나의 말. 타인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말을 하게끔 한다. “얘야, 무슨 일이니?” “여보세요. 어디 아픈가요?” “물 좀 드실래요?” “기분이 어떠니?” “과로했나 보다” 등등. 우정과 사랑의 관계일 때에만 가능한 말들이다. 참된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그의 얼굴에서 내가 읽은 그의 속내가 항상 맞을 수도 없거니와 참된 관계란 말 대 말의 관계가 아니라, 얼굴 대 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논리를 더 확장해보자. 우리는 인간 관계를 세 종류로 나누어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는 얼굴-말의 관계로,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사람에게 그의 속내를 짐작한 말을 건네는 사랑의 관계다. 둘째는 말-말의 관계로, 상대방의 얼굴을 말로 듣지 않고 공기 중에 내뱉어진 서로의 말만을 말로써 주고받는 습관적인 관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얼굴의 관계로, 나의 말로 상대방이 상처받은 얼굴을 띠도록 만드는 미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짐작하듯 첫 번째 관계일 때 사랑은 감동으로 시작되고, 두 번째 관계에서 사랑은 무력하게 시들어가며, 세 번째 관계에 이르면 사랑은 아예 남보다 못한 파국에 이르게 되는 법이다.



카사베츠 영화의 남녀 주인공 리처드와 마리아 부부의 사례를 보자. 둘은 분명 상대의 얼굴을 말로써 읽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혼에 이르렀을 터이다. 그러나 꽤 오랜 세월이 흐르자 둘은 이제 서로의 얼굴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리처드는 권태에 빠진 마리아의 속내를 읽으려 하지 않고, 마리아는 무기력에 빠진 남편의 박탈감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말을 말로써 주고받으며 희희낙락할 뿐이다.



익숙한 집에서 낯선 모습으로 재회 얼굴을 보지 않으니 그(그녀)의 상처를 쉽게 읽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서로 관계를 끝내는 말을 피할 재간이 없다. 둘은 상대방의 얼굴을 읽기는커녕 상대의 얼굴에 상처를 주면서, 더 불행하게도 상대에게 상처를 준 사실보다 상대에게서 받은 상처만을 기억한다.



분노와 당혹감에 젖은 두 사람은 어색한 자리에서 서둘러 도망친다. 둘은 각자의 외도 상대로부터 쉽게 위로받고 안정감을 되찾는데, 매춘부는 리처드의 얼굴을 보며 그의 속내를 읽어주고, 젊은 제비 또한 마리아의 상처받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보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중산층 생활에, 그리고 서로에게 너무나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둘은 함께 사는 익숙한 집에서 낯선 모습으로 다시 만난다. 서로의 얼굴을 애써 피하면서 허허롭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부부. 이 둘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말-얼굴’이란 미움의 관계와 ‘말-말’이라는 습관적 관계를 넘어서 ‘얼굴-말’이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강신주 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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