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정은에 학습효과 줬지만 ‘비정상 사태’ 문구가 지뢰밭

중앙선데이 2015.08.30 03:57 442호 3면 지면보기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오른쪽)이 지난 25일 0시55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황병서 북한 군 총정치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22일부터 43시간에 걸친 고위급 접촉에서 남북은 당국회담 개최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통일부는 29일 김 실장과 황 국장이 당시 ‘화장실 담판’을 했다는 일부의 추측을 공식 부인했다. [중앙포토]



남북이 준전시상태까지 가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43시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25일 ‘8·25 합의’를 도출했다. 위기는 일단 넘겼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합의문에는 지뢰 폭발에 대한 북측의 유감 표명, 확성기 방송 중단과 준전시상태 해제가 들어갔다. 남북 당국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 활성화도 포함됐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이벤트 등 숨어 있는 ‘지뢰’가 적지 않다.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낸 정옥임 고려대 초빙교수(18대 국회의원), 차두현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 객원연구위원(경기도지사 외교정책특보),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북한학)가 중앙일보 회의실에 모여 ‘8·25 합의’ 이후의 남북관계를 분석·전망했다.


[8·25 남북 합의 이후] 변수 많은 남북관계

-이번 합의문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정옥임 교수(이하 정)=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북한의 유감 표명을 받아냈다.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고 한 것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생기면 얼마든지 다시 확성기 스위치를 켤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차두현 위원(이하 차)=목함지뢰 도발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적시되지는 않았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회담’을 명시한 합의문 1항이 제일 중요하다. 1항에 대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느냐가 나머지 2∼6항의 집행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북한이 대화를 이어가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와서 미봉식으로 합의했을 수도 있다.▶김근식 교수(이하 김)=북한의 군사도발을 가장 중요한 회담 의제로 남북이 직접 접촉해 회담했다는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과거엔 전례가 없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는데 이번 합의문 어디에 악마가 숨어 있나.▶차=만약 9∼10월에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면 비정상적인 사태로 볼 건지 의문이다. 만약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도 비정상 사태가 아니라고 하면 결과적으로 대량살상무기(WMD)와 핵은 남북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문제라는 북한의 논리를 들어주는 것이다.▶김=악마의 디테일은 ‘비정상 사태’라는 표현의 해석이 모호하다는 부분에 있다. 북한은 확성기 방송의 영구 중단을 요구했고, 남쪽은 재발 방지 문구를 요구했다. ‘비정상적 사태가 없는 한 확성기 중단’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절충했다. 나중에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합의 정신에 비춰 보면 북이 휴전선이나 서해상에서 남측에 군사적 도발을 할 경우를 비정상적 사태로 보는 게 맞다.▶정=3항의 ‘비정상적 사태’와 관련, 지금까지는 비무장지대(DMZ), 북방한계선(NLL) 충돌이 비정상적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앞으로 판단 주체는 우리다. 국제사회가 하지 말라고 하는 4차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비정상적 사태를 만들면 김정은이 경기를 일으키는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여지를 만들게 된다. 우리의 선택지를 넓힌 측면도 있다.



-주고받기의 득실을 따진다면.▶차=큰 흐름으로 봤을 때 55대 45다. 북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바둑으로 치면 세력 싸움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이겼다. 그러나 계가(計家) 단계에서는 사과의 진실성 문제, 5·24 제재 해제와 핵실험 추가 제재 등 악마의 디테일이 있다. 세력 싸움에서 이겼지만 우리가 방심하면 뒤집힐 위험이 있다.▶정=51대 49로 남한의 우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갈등 국면에서 김정은의 경륜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부분이 중요하다. 김정은에게 학습효과를 준 것도 성과다.▶김=60대 40으로 남한이 잘했다. 이번 합의가 일시적 조정인지 아니면 상승 국면을 탈지를 봐야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일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첫 단추를 뀄다고 본다.



-승부를 떠나 한반도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지도 확인했는데.▶김=처절하게 느꼈다. 이 상태로는 맘 놓고 살 수 없다. 군사적 억지나 사후 응징만으로 이뤄지는 평화는 불안하고 차가운 평화다. 향후 남북협상에서 안전한 평화를 위한 담대하고 지혜로운 접근을 해야 한다.▶정=이번 협상이 잘됐다고 앞으로 한반도 평화가 온다는 얘기도 아니고 북한이 개과천선했다는 얘기도 아니다. 북한 정권이 존재하는 동안 계속될 수 있는 딜레마다. 정부가 어떤 식으로 차분하게 현실주의적인 대화를 만들어 내느냐를 지켜보고 있다.▶차=한반도가 정전 상태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남북에서 한 명만 자제력을 잃었어도 전쟁이 나는 상황이었다.(황병서 북한 총정치국장은 합의문을 발표한 25일 오후 북한 방송에 나와 남측이 근거 없는 (지뢰)사건 만들었다고 딴소리를 했다. 이에 대해 세 전문가는 북한 내부의 정당화 논리라며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숨겨진 이면 합의는 없었을까.▶정=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확성기를 제발 틀지 말라면서 내놓을 카드가 뭐였겠나. 43시간이면 정상회담보다 더한 것도 나왔을 수 있다.▶김=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할 때 의견을 포괄적으로 몰고 가려 했을 거다. 그래서 본안인 사과 문제나 재발 방지 대책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차=공개 협상이어서 이면 합의는 없었을 것이다. 천안함 사건, 5·24 조치, 금강산 관광 재개, DMZ 문제, 이산가족 상봉, 정상회담까지 모두 테이블에 올려 각자 의견을 개진하고 논의했을 거다.



-도발-협상-보상의 악순환을 끊었나.▶정=앞으로 5·24 조치 해제, 정상회담, 금강산 관광 등이 어떤 식으로 대화 테이블에 올라가는지를 봐야 한다. 다만 과거에는 남북관계가 진전될 때 북한에 반대급부가 주어졌지만 이제는 북한이 스스로 선의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김=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악순환 구조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북한도 변화된 상황을 알고 있다.



- 앞으로도 북한에 강하게 나가야 하나.▶김=원칙을 지켰더니 잘됐다고 여기에 재미를 붙여 강경하게 나가면 일을 그르친다. 사회 일각에서 앞으로 북에 대해 단호하게 밀어붙이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렵게 조성된 대화국면에서 북한이 대화 테이블을 걷어차게 만드는 빌미를 줄 수 있다. 우리가 북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정=강경책과 원칙론은 구분해야 한다. 도발에 대응하는 것은 강경책이 아니다. 물론 대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차=이번에 일방적으로 이긴 게 아니다. 상대방도 절반가량은 이긴 거다. 이번에 쓴 방법을 또 써먹으면 북은 반드시 반격 카드를 들고 나올 거고, 두 번째는 안 먹힐 거다.



-북한이 또 도발하면 확성기를 다시 틀고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텐데.▶김=휴전선 일대에서 도발이 있다면 당연히 확성기 방송을 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공언했고 북한도 알고 있다. 북한이 9∼10월 미사일 도발을 하더라도 8·25 합의에서 언급한 비정상 사태로는 보지 않을 수도 있다.▶차=비정상 상황으로 간주하게 되면 남북이 그때까지 진행하던 대화를 중단하고 확성기 방송을 재개해야 한다. 남북관계 진행과 별개로 북한은 9∼10월에 미사일 발사 도발을 할 거다. 한·미 간에 내부적으로 북한의 비정상 사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정=이거는 되고 저거는 안 된다를 지금 규정할 이유가 없다. 휴전선 도발과 핵·장거리 미사일 도발을 나누다 보면 또 다른 남남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킨 북한이 도발을 안 하면서 대화에도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은.▶정=내부 체제단속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갈수록 경제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 김정은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뭔가 남북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차=북한이 대화에서 빠져나갈 명분을 주지 않아야 한다. 북이 주변국들에 의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남한을 징검다리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주변국을 압박하기 위해 장거리 미사일 도발을 할 가능성이 크다. 당국 대화가 풀리려는 와중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곤혹스러울 수 있다. 대화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게 된다. 북이 맞춤형 기행을 시작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치밀한 고려가 필요하다.▶김=북은 남측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얻고자 하는 절박한 게 없다. 남북이 상호 제안한 우선순위도 다르다. 정부가 우선순위 차이를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



-9월 이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정=일단 만나긴 만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껄끄러운 5·24 제재를 풀 때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진짜 원칙을 지키는지, 아니면 임기 말에 정치적 고려를 하는지가 확인될 것이다.▶차=북한은 당 창건 70주년에 맞춰 우주과학기술 대국이나 완전한 핵 보유국 같은 상징성을 보여주려고 뭔가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 한·중 정상회담(9월 2일)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긍정적 역할에 방점을 두는 건 좋은데 자칫 북한에 대한 압력으로 비쳐질 수 있는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김=이산가족 상봉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도발하면 상당히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9월 말∼10월 초 리스크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