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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더 많은 이해·양보·배려 없으면 ‘8·25 효과’ 단명

중앙선데이 2015.08.30 03:42 442호 5면 지면보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앞줄 왼쪽)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한 평양 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해 특별기에서 내리고 있다. [중앙포토]



‘8·25 남북 합의’는 남북한의 극한적 대치 상황을 일단 진정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합의 내용은 현재의 갈등 상태를 풀기 위한 조치와 향후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들로 구성돼 있다. 전자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는 반면 후자는 대체로 추상적인 내용들이어서 실제로 구체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많은 후속 조치를 필요로 하고 있다.  8·25 합의 이전에 남북한 사이에는 지금까지 4개의 공동선언 또는 합의문이 발표됐다. 1972년의 7·4 공동성명, 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 2000년의 6·15 공동선언, 2007년의 10·4 공동선언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반면 이번의 8·25 합의는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8·25 남북 합의 이후] 과거 사례로 본 남북관계

과거 합의는 평화적 분위기서 나와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서 발표된 7·4 공동성명은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당시 내각 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상호 방문해 김일성과 박정희를 만났고 그 결과를 공동성명에 담았다.  남북 기본합의서의 경우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88년의 7·7 선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의 제안으로 90년부터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하며 총리회담을 개최했다. 제5차 회담에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당시는 냉전 종식 이후 체제 위기에 처한 북한이 유연한 대외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다. 6·15 공동선언은 98년에 시작된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 포용정책의 결실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 기조가 이어져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10·4 공동선언이 나왔다.  이와 같이 과거의 선언이나 합의문들은 장시간의 평화 분위기 속에 준비작업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으나 이번 8·25 합의는 평화공존 상황이 아닌 대치 상황에서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즉흥적이고 임시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번 합의문에 새로운 관계 발전을 위한 조항이 포함돼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과거와 같은 수준의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따라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의 대화와 협상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10·4 선언은 정권 바뀌며 사장돼 과거의 선언이나 합의문들은 사전 준비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후속 조치가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7·4 공동성명 직후부터 남북 적십자회담과 조절위원회가 병행해 개최됐다. 이러한 대화 분위기는 1년 정도 지속되다가 중단됐다. 그 이유는 남한은 비정치적 교류부터 시작하려는 의도를 보였으나 북한은 정치·군사회담을 우선순위에 놓아 의견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남북 기본합의서도 1년 남짓 후속 조치를 시행하다가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채 93년 3월 북한이 1차 핵 위기를 조성함에 따라 사문화되고 말았다.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이행을 위한 군사분과위원회 등을 설치하고 협상을 계속했다. 당시 북한이 무슨 이유로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평화 분위기를 좌절시키는 ‘벼랑 끝 외교’를 선택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선 북한이 당면한 체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한과 평화를 모색하는 것보다는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지어 체제 보장을 받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하면서 모험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의 기본합의서는 남북한 간에 평화와 통일의 초석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기본합의서 내용이 제대로 이행되지도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혔다.  6·15 공동선언은 가장 많은 부분이 이행되고 후속 조치가 이뤄진 선언문이다. 정상회담 직후 장관급회담·국방장관회담·군사실무회담이 이어서 개최됐고, 경제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하기 위해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를 만들어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을 했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한의 화해를 가져왔다는 점 이외에 두 가지 성과가 있었다. 첫째, 2001년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가 들어서 북한과 적대관계에 놓이고 2002년 10월부터 북한의 2차 핵 위기가 시작됐는데도 남북한 관계는 변함없이 유지된 점이다. 둘째, 개성공단을 조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른 선언과 합의문들은 1~2년 뒤 사장됐으나 6·15 공동선언은 개성공단이라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유산을 남겼다. 6·15 공동선언은 7년 뒤 10·4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10·4 선언은 남북한 교류와 협력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고, 총리회담의 결실도 이룩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노무현 정부 말기에 너무 늦게 발표됐고,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이행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사문화됐다.



‘8·25 합의’ 급한 불 끄기에 만족한 듯 이처럼 과거의 공동선언과 합의문들은 평화 분위기에서 사전 준비를 거쳐 이뤄졌고, 바로 이어 후속 조치들이 나왔음에도 지금까지 이행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번의 8·25 합의는 평화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도 아니고, 사전 준비 과정도 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당장 군사대치를 푸는 데 해당되는 조항 이외에 장기적인 관계 발전에 해당되는 조항들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더 많은 이해·양보·배려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공동선언 또는 합의문에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또는 국내외적으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실현이 어려워 보이는 조항들을 의도적으로 삽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조항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6·15 공동선언의 1항과 2항은 통일에 대한 조항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발표된 9·19 공동성명, 2·13 합의, 10·3 합의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북·미 관계 정상화가 포함돼 있었지만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체로 급한 불만 끄는 데 만족하고 장기적인 조치 조항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8·25 합의 6개 항을 봐도 이러한 조항들이 있다. 합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는 생각을 유지한 채 남북한 관계의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군사적 대치 상황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계속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며칠 밤을 새우며 고생해 만든 합의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기존의 적대적인 인식을 바꾸면서 평화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렵게 얻은 좋은 기회를 최대한 잘 살리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다.



 



김계동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교수. 연세대 정외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국제관계학 박사. 한국전쟁학회 전 회장.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정보대학원에서 15년간 교수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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