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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의 어머니는 필요, 필요의 척도는 상대가격

중앙선데이 2015.08.30 02:51 442호 2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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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wn 그림 1 헤론의 자동문 원리, 공기역학과 자동장치』 1899, 176쪽. 자종으로 신전의 문을 여는 이 기술은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림 1 헤론의 자동문 원리, 공기역학과 자동장치』 1899, 176쪽. 자종으로 신전의 문을 여는 이 기술은 실용화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Heron)은 고대 유럽의 수학과 공학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1세기에 활약한 학자로, 물과 공기와 기계장치를 결합해 많은 기발한 발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고안한 신전 자동문의 원리를 보여주는 설계도가 여기 있다. 자동문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런 자동문은 당시에 널리 제작되어 사용되었을까?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30- 혁신의 유인

자동문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신전 앞에 도착한 사람이 오른쪽에 보이는 화로에 불을 피운다. 화로는 지하의 기계장치로 연결되어 있다. 화로 아래에는 물이 절반 찬 구체가 설치되어 있다. 화로의 열기가 아래로 전해지면 구체 내의 공기가 팽창하여 물을 파이프를 통해 양동이로 밀어낸다. 그러면 양동이의 무게가 증가해 도르래와 사슬로 연결된 신전의 밑기둥을 돌리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문이 열리게 된다. 이 장치가 작동되는 것을 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로에 불을 놓자 잠시 후에 신전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다니! 마치 신전을 감싸는 영묘한 힘이 작용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자동문이 고대 신전들에서 널리 사용되었을까? 그런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동문의 사용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이 장치는 천재적 공학자 헤론의 머릿속에 머무른 아이디어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신묘한 장치는 실용화되지 않았을까? 우선은 시간이 문제였다. 화로에 불을 놓고 한참이 지나 기계장치의 작동이 끝나야 문이 열렸을 것이다. 또 누구든 신전 문을 열 수 있을 테니 보안도 문제였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 앞에 경비를 세우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가 많았던 시기였으니 몸집이 좋고 방문자를 관리할 능력이 뛰어난 자를 뽑아 경비 업무를 맡기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게 아닌가. 자동문은 기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실용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2 콘라드 카이저, 전쟁요새』, 15세기 중엽.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렸다.



중세의 뛰어난 발명품들 유럽 고대에 헤론이 있었다면 중세에는 콘라드 카이저(Konrad Keyser)가 있었다, 독일 지역 출신의 군사 기술자였던 카이저는 『전쟁요새(Bellifortis)』를 통해 자신이 고안한 수많은 발명품을 선보였다. 그림 2는 말을 이용해 강을 건너는 장치를 보여준다. 강의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밧줄로 두 기둥을 잇는다. 이 밧줄에 추가로 줄을 걸어 반대편 기둥에 연결한다. 말들을 이 줄에 걸어 물에 빠지지 않게 하고 말을 탄 사람이 말을 채찍으로 몰면 말들이 물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된다. 일견 창의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이 장치가 널리 사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값이 상당히 비쌌던 말을 이렇게 힘든 방식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바람직했을까? 바지선에 사람과 말을 태우고 반대편에서 끄는 방식이 더 안전하고 손쉬웠을 것이다. 이런 발명품들은 고대와 중세에도 인류의 지식과 기술이 만만치 않았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여건’만 허락했다면 창의적인 두뇌가 생각해 낸 기발한 발명품들이 현실에서 일찍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여건’의 중심에 생산요소의 상대가격이 있다. 노예 노동이 값싸고 풍부했던 고대에 사람들은 자동문이 필요 없었고, 중세에 값비싼 말이 힘을 써야만 강을 건너게 하는 장치는 경제성이 없었다. 희소해서 값이 비싼 생산요소를 대체하는 발명이어야만 현실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발명의 이런 속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서였다. 과거에 발명이 소수의 호기심 많고 재기 넘치는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산업혁명 시대에는 발명이 만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발명은 더 이상 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보물 상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서 왜 영국이 기술진보 경쟁에서 다른 국가들을 제치고 선두에 섰는지 의문을 던져보자. 이에 대해 그간 학자들은 다양한 설명을 제시해 왔다. 노동공급이 원활했다, 자본시장이 발달했다, 천연자원이 풍부했다, 도전적 기업가정신이 가득했다, 재산권보호가 잘 되었다, 지리적 조건이 유리했다 등등. 그러나 이런 설명 각각에 대한 반론도 많이 제기되었다. 영국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영국사회가 다른 국가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차별화 요인들을 추출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많았다. 이런 비판을 수용해서 최근에는 생산요소의 상대가격의 역할을 강조하는 설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영국에서는 1인당 임금수준이 높은 반면에 새 에너지원인 석탄의 매장이 풍부했다. 즉 노동의 상대가격이 높았던 반면에 석탄의 상대가격이 낮았다. 따라서 노동을 절약하고 대신에 석탄을 많이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컸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기관의 개발이었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응축기 발명으로 정점을 찍은 증기기관의 개발은 다시 면공업, 제철공업, 석탄공업, 철도업을 발달시키는 도미노 효과를 낳았다. 한편 상대가격의 조건이 영국과 달랐던 국가들은 이와 다른 상황을 맞았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수력이 풍부한 프랑스나 노동력이 풍부한 인도에서는 경제성이 없었다. 노동절약형 기술진보는 영국의 혁신가들에게만 각별히 구미가 당기는 메뉴였다.

그림 3 헨리 앨켄, 증기의 진보』, 1828년. 많은 차들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장면.



증기기관의 발달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장과 광산은 물론 교통수단도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그림 3은 런던의 화이트채플로드(Whitechapel Road)가 어떤 풍경으로 변하게 될지 헨리 앨켄(Henry Alken)이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은 『증기의 진보(The Progress of Steam)』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차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내뿜는 시커먼 연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차량마다 수많은 사람들과 각종 음식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다.



증기로 작동하는 자동차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사실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기술자인 니콜라-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였다. 그가 1769년에 제작한 증기자동차는 파리 시내를 시속 4km의 속도로 달렸다. 바퀴 셋이 달린 동체에 커다란 보일러를 올려놓은 형태였다. 이 증기자동차가 곧 영국에 소개되었고 뒤이어 솜씨 좋은 기술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개조되었다. 1826년에는 28인승 차량이 정기적으로 운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림 3의 화가는 머지않아 도시들이 수많은 증기자동차에 의해 점령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지극히 개연성이 높은 예측이라고 볼만 했다.



진화하는 자동차 발명 그렇지만 이후의 기술진보 방향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화가의 예측과는 달랐다. 1886년 독일의 고틀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와 카를 벤츠(Karl Benz)가 내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자동차의 역사에 새 경로가 그려졌다. 이들의 내연기관은 새 연료로 등장해 고효율을 보인 석유를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차체는 훨씬 가벼워졌고 속도는 크게 높아졌다. 미국의 혁신적 기업가 헨리 포드(Henry Ford)는 1913년 어셈블리 라인을 이용한 자동차 양산체제를 갖춤으로써 자동차 대중소비의 길을 열었다. 어셈블리 라인은 자본에 비해 노동이 희소한 미국의 경제상황에 부합하는 기술 선택이었다. 자동차는 오늘날에도 ‘여건’을 반영해 전기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수소연료차 등의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헤론의 신전 자동문, 카이저의 도강(渡江) 구조물, 산업혁명 시대에 개발되어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온 자동차 모두가 발명을 위한 인간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모든 발명이 상용화되어 발명가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생산요소의 상대가격 상황에 딱 들어맞는 발명만이 사회적 필요에 부응했다. 분명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이 필요는 상대가격이라는 모습을 띠고 인류와 함께 해 왔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경제사 들어서기』 『경제사: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산업재해의 탄생』 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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