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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유별’ 무시한 R&D 탓, 교통사고 때 여성 부상 2배

중앙선데이 2015.08.30 02:48 442호 14면 지면보기
대장암은 국내 65세 이상의 여성들에게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암이다. 남성들이 주로 원위부 대장암(항문 쪽)에 걸리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근위부 대장암(대장 입구 쪽)이 흔한 편이다. 하지만 여성의 대장은 좁고 길기 때문에 내시경으로 암을 찾아내기가 더 어렵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처럼 질병에도 남녀 차이가 있고 진단과 치료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남녀가 유별하지만 과학자들은 생물학과 의학 분야 실험에서 재료로 사용하는 동물의 성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분야별로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의 22~44%는 실험동물의 성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성별을 제시한 연구에서도 수컷 동물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여성 질환에 관한 연구는 암컷 동물을 사용하는 게 맞지만 실제 연구에서는 수컷만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연구자들이 암컷 동물의 생리주기에 따른 호르몬 변화 등의 복잡한 문제를 피하려는 목적도 일부 있었다. 
여성 질환 연구도 수컷 동물로만 실험이처럼 과학·기술·공학·의학 분야의 연구에서 성별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연구의 질을 높이는 혁신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른바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이다. 지난 25~28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소장 이혜숙) 등이 마련한 제6차 젠더 서밋(gender summit)도 이런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다. 2011년 유럽에서 시작된 젠더 서밋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진정한 남녀평등 위해 … 세계는 지금 ‘젠더 혁신’ 바람

젠더 개념은 생물학적인 성(性·sex)을 구별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젠더는 생물학적인 속성 외에 사회적인 환경과 훈련에 의해 남녀 기질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한 용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성다움’ ‘남성다움’에도 사회·문화적 영향이 스며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을 더 민감하게 느끼지만 사회·문화적인 영향 탓에 고통을 숨기려 드는 경우가 많다. 고통을 치료하는 연구가 제대로 된 결과를 얻으려면 성과 젠더 개념을 모두 연구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혜숙 소장은 “젠더 혁신은 단순히 남성에 비해 숫자가 적은 여성 과학자의 숫자를 늘리고, 여성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공유한다면 과학기술 연구에서 시행착오와 비용을 줄이고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젠더 서밋에 참석한 미국 스탠퍼드대 론다 슈빙어 석좌교수는 “1997~2000년 사이 미국에서 총 열 가지 의약품이 판매 중지됐는데, 이 중 여덟 가지는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을 일으킨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의약품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여성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나다 맥길대의 제프리 모길 교수는 “남성과 여성이 고통을 느끼는 메커니즘이 다른데, 여성에게는 효과가 없는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가 여성들에게 판매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젠더 개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전통적으로 폐경 후 여성의 질병으로 알려진 골다공증 환자의 3분의 1을 남성이 차지한다고 밝혀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태지역 첫 젠더 서밋 서울서 열려역사는 길지 않지만 젠더 혁신은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에서는 탑승자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한다. 하지만 충돌 실험에서는 남성을 기준으로 인체모형(더미)을 만들어 실험했다. 이 때문에 자동차 시트의 목 받침이 몸무게가 가볍고 키가 작은 여성들의 부상을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추돌사고 시 여성 경추 환자가 남성의 두 배나 발생하는 이유다. 지난해부터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도 여성 신체 기준에 맞는 더미를 실험에 반영하고 있고, 유럽에서는 컴퓨터 충돌 모의실험에 임신부 조건을 추가하기도 한다.



젠더 개념 도입을 계기로 인종 등 다양한 인구 집단의 특성을 연구에 반영하기도 한다. 또 국내 연구진도 환경과 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 젠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서 주제 발표를 한 최진희 서울시립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유해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즉 독성을 연구할 때는 생물학적 성별 개념을, 실제 화학물질에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파악할 때는 젠더 개념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직업이나 음식 문화, 생활습관 등에 따라 노출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지혜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의학영양학과 교수는 “튀김요리를 주 2회 섭취해도 남성은 고혈압 환자 비율이 거의 섭취하지 않는 경우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여성의 경우는 두 배로 늘어났다”며 “고혈압과 관련해 여성은 남성보다 더 민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젠더 개념의 중요성이 확인되면서 각국에서는 발 빠르게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최근 연구개발에 사용되는 실험동물의 성비를 맞춰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아케르스후스 응용과학대학의 커트 라이스 총장은 “노르웨이 대학들은 연구비 신청서에 젠더 개념이 포함되도록 의무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젠더 개념 지나치면 부작용” 목소리도젠더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 연구논문은 학술지 게재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세계 3대 의학저널의 하나인 랜싯(The Lancet)의 아시아 편집장인 헬레나 왕 박사는 “랜싯에서는 웹사이트를 통해 성별 특성을 의학 연구 단계에 포함시키고, 성별 데이터 분석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학술지 출판사 엘스비어(Elsevier)의 지영석 회장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여성 과학기술자가 많은 기여를 했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연구에 여성이 공동저자로 참여했을 때 논문의 품질이나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젠더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예를 들어 인공 무릎 관절은 인종에 따라 남성도 작은 사이즈의 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업계에선 여성용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남성이 시술을 기피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성·젠더 개념이 너무 부각되면 인종·환경·생활습관 등 다른 요인이 연구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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