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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본 피해자와 가해자?깨지는 침묵과 금기

중앙선데이 2015.08.30 01:18 442호 6면 지면보기
“왜 그렇게까지 했나요?”“끝장을 내려고 그랬지.” 두 사람의 대화는 사뭇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화자와 맥락이 더해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답한 사람은 칼로 어깨와 배를 찔렀는데도 람리가 죽지 않자 음경을 자르고 발길질을 강행한 가해자다. 묻는 사람은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오는데도 도망친 람리의 막내 동생 아디다. 1965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행해졌던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의 대학살 때 희생된 100만명 중 한 사람이 피해자 대표로 나서 가해자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50여 년간 금기로 여겨졌던 단어가 세간의 입에 오르기 시작한 건 영화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41) 덕분이다. 그는 첫 연출작인 ‘액트 오브 킬링’(2013)에서는 대학살을 주도한 민병대원들이 당시 장면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파란을 일으키더니 신작 ‘침묵의 시선’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면 인터뷰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차용했다. 전작을 통해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피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속편을 만든 셈이다. 그는 1ㆍ2편이란 단어 대신 ‘동반자’ 같은 영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같은 문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있기 때문일 터다. 조슈아는 현재 다큐멘터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다. 첫 영화로 전세계 영화제에서 70여 개 상을 휩쓸고 두 번째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 5관왕을 석권해서만은 아니다. 그간의 다큐멘터리가 카메라 한발 뒤에 서서 지켜보는 입장을 취해왔다면, 그는 관객이 등장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충격요법을 사용한다. 조슈아 감독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가까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마치 내 형이, 내 자식이, 내 부모에게 벌어진 일일수도 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다음달 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25일 한국을 찾은 조슈아 감독이 나흘 내내 GV(Guest Visit)를 통해 관객을 직접 만났다. 이날 노무현재단이 주최하는 제2회 사람사는세상 영화축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무대에 선 조슈아는 “모두들 입을 모아 과거는 지나간 일이니 묻어달라 하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고 했다. 가해자는 협박의 뜻으로, 피해자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어 “과거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에 용기를 가지고 180도 틀어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며 “서로가 알고 있는 상황이 마련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마 영화의 배경은 낯설 테지만 내용은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어 공격 대상을 설정하거나 아버지 혹은 남편이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전혀 몰랐다고 말하는 표정은 낯이 익다. 심지어 “피해자들의 자손이 나를 좋아하고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당선이 되었겠느냐”고 반문하며 “정부가 시킨 게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 행동이었다”는 정치인의 주장은 익숙하기까지 하다. 예술은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가. 해묵은 질문이지만 이 영화에 관해서는 감히 옳다고 답할 수 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상영은 인도네시아 전역 개봉으로 확장됐고 언론은 당시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으며 이제 대학살은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됐다. 물론 아직 모두가 인정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과거의 두려움 속에서 벗어날 계기가 마련됐다는 건 고무적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지난 70년의 침묵을 깰 수 있게 될까.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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