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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넘어

중앙선데이 2015.08.30 01:09 442호 14면 지면보기

프리드리히 헤벨의 초상화(1855)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1’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림이 영혼의 블랙홀이 되어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뭔가 나른하면서도 섬뜩한 기운, 보는 이를 유혹하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그 유혹의 책임을 지지 않을 것 같은 당당함이 느껴진다. 이 유혹은 철저히 일방적이다. 그녀는 매혹하지만 매혹 당하지는 않는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난공불락’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를 들고도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이는 그녀의 입가에는 살기(殺氣)보다는 취기(醉氣)가 서려있다. 그 취기는 술 때문이 아니라 승리감, 혹은 도취감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보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죽였다! 너희, 잘난 남자들이 아닌 한 여자, 보잘것없는 과부 유디트가 적장(敵將)의 침실에서 그의 목을 직접 베었다! 클림트의 ‘유디트2’는 정면이 아니라 살짝 옆으로 몸을 비튼 채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남성을 도륙하고도 태연자약하게 그 수급(首級)을 틀어쥐고는 아름다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마치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려는 듯 미지의 장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유디트는 희미하고도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은 절대로 그 대상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 듯한 무심함과 태연자약함이 그녀를 ‘완벽한 주체’로 만든다. 대상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완전한 자유로움이,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는 듯하다. 나는 클림트의 유디트를 볼 때마다 감탄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정말 유디트의 미소는 이렇듯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뇌쇄적이기만 했을까. 아니, 그녀는 정말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자신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군중을 조롱하며 정작 자신은 그들의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것 같은 태연자약함은, 혹시 유디트를 ‘미적 대상’으로만 보는 남성 화가의 달콤한 환상이 아닐까….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1(1901·부분)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2(1909·부분)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유디트(1598~99·부분)


정여울의 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프리드리히 헤벨의 『유디트』

여성으로 태어난 영웅의 한계 최근 프리드리히 헤벨의 걸작 『유디트』를 읽으면서 나는 이 의심이 타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클림트의 유디트와 달리 헤벨의 유디트는 고뇌하고 슬퍼하며 분노한다. 클림트의 유디트에서는 역사성이 사라져 있다. 헤벨의 유디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분명히 신경 쓴다, 그것도 아주 많이. 클림트의 유디트는 성적 매력을 무기로 휘둘러 남자를 죽이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듯한 당찬 모습이다. 당혹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다. 사람들이 팜므파탈(치명적인 여성)을 ‘악녀’라고 왜곡해서 이해하는 이유도 그런 ‘타인의 시선에 대한 무심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헤벨의 유디트는 다르다. 홀로페르네스의 침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유디트의 ‘순결’을 문제 삼자, 그녀는 뼈아픈 고통을 느낀다. 힘으로는 홀로페르네스를 제압할 수 없었기에 온갖 기지를 발휘하여 그와 하룻밤을 보낸 뒤 잠든 그의 목을 자른 유디트. 그림 속의 유디트는 웃고 있지만, 이야기 속의 유디트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그녀는 ‘이제 나는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녀의 질책에 마음 졸이며,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홀로페르네스와의 침실에서 빠져나와 깊은 굴욕감을 느낀다. 그녀는 온갖 기지와 재치, 매력과 지성을 이용하여 그 어떤 남자들도 접근조차 하지 못한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제압하여, 마침내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유디트가 아니었다면 당시 유대 민족은 결코 아시리아의 최고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디트가 만약 적장을 죽인 ‘남자’였다면 아무 조건 없이 영웅 대접을 받았겠지만, 여인으로 태어난 유디트는 결코 임신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만약 홀로페르네스의 아이를 가졌다면, 자신은 반드시 아이와 함께 죽어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내 가슴은 미어졌다. 유디트는 왜 스스로를 영웅으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녀는 왜 자신이 성취한 일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가.



고독하고 우울한 백척간두의 여성 그림 속 유디트는 아름답긴 하지만 현실과 합치되지 않는다. 클림트와 카라바조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이상화한 유디트는 그림 속에서나 가능한 낭만적인 환상이 아닐까. 남성 화가들은 유디트를 통해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한 신비감을 느꼈지만, 나는 그 오색찬란한 그림들 앞에서 실제 유디트는 결코 이렇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을 품었다. 나는 『유디트』를 읽고 난 후 한동안 깊은 우울에 빠졌다. 유디트의 난제가 현대 사회에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디트』에서 나는 아름답고 치명적이고 범접 불가능한 팜므파탈이 아니라, 고독하고 우울하며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선 한 여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유디트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홀로페르네스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정절을 의심하는 사람들, 그녀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를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여성차별적 사회였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유디트는 반쪽짜리 영웅,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는 비극적인 영웅이 되었다. 여성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은 이렇듯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논개나 잔다르크, 유디트 등 역사 속 여성 영웅들의 공통점은 영웅의 자리에 올라간 대신 여성으로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이 어떤 ‘이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가 충돌한다. 첫째, 여성으로서의 행복. 둘째,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꿈. 셋째, 공동체의 이상. 여성이 출산을 하면 득달같이 일자리를 빼앗고,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하면 온갖 차별을 일삼는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꿈을 펼칠 수 있겠는가. 헤벨의 유디트조차 남성이 상상한 여성의 모습이지만, 언젠가 여성 스스로가 제대로 그려낸 더 멋진 유디트의 모습이 나오기를 꿈꿔 본다. 남성도 해내지 못한 수많은 일들을 해낸 최초의 여성 영웅 중 하나가 바로 유디트이므로. 남성이 무시하거나 짓밟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그 수많은 꿈과 이상을 쟁취하려는 여성들은 누구나 조금씩 ‘우리 사회의 유디트’이니까. ‘개인’으로서의 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연대감, ‘여성’으로서의 행복. 이 세 가지 모두를 쟁취하고자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유디트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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