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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과 여학생들의 차이

중앙선데이 2015.08.30 00:09 442호 34면 지면보기
중학교 2학년 때 소풍은 특별했다. 가을소풍이었는데 해운대 쪽으로 갔다. 바다로 간 것은 아니고 근처 산으로 간 것이다. 그날 소풍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다. 어느 산으로 갔는지 경치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여느 소풍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리라. 학교에서 가는 소풍이란 게 그랬다. 만일 한 지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닌다고 해 보자. 한 해 두 차례 봄·가을에 소풍을 가는데, 수학여행을 뺀다 해도 대략 열여덟 번 정도를 가는 셈이다. 지역에 있는 산이란 산은 다 가고 또 가고 또 가게 된다. 보물찾기와 장기자랑이 들어 있는 소풍의 프로그램도 비슷하고 매년 싸갔던 김밥 역시 비슷해서 따로 기억할만한 것이 없다. 약해진 기억력 탓은 아닐 것이다. 그날 소풍이 특별했던 것은 소풍이 아니라 소풍이 끝난 후 생긴 일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버스 정류장에서 해산하는 것으로 그날 소풍은 끝났다. 다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친구들끼리 뭉쳐 시내로 놀러 갔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약간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 혼자 바다 쪽으로 갔다. 무리 속에 오래 있으면 답답해 어떻게든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영혼의 고독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어떤 허세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중2 남자아이였으니까. 바다를 보며 중2 남자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바다 앞에 서면 누구나 사람은 혼자라는 운명적 고독을 생각했을까?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금세 싫증을 느끼고 나는 역으로 갔다. 고독한 중2 남자아이에겐 완행열차의 낭만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날 소풍이 특별했던 것은 바다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차를 탔기 때문이다. 철로의 침목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철로 변에 핀 코스모스도, 가을 하늘을 날아다니던 잠자리 떼도. 정말 본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금방이라도 출발할 것 같은 열차에 서둘러 타느라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열차 안에는 여학생들이 단체로 가득 타고 있었다.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칸만 아니라 다른 칸들도 그랬다. 마치 그 열차를 통째로 빌린 것처럼 말이다. 학교에서 가는 소풍이란 게 그랬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의 모든 초·중·고에서 같은 지역의 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곳으로 소풍 온 다른 학교 학생들을 보는 것은 다반사였다. 열차에 내가 타자 여학생들이 환호했다. 불길했다. 여학생들 역시 특별할 게 없었던 그날의 소풍에서 마침내 그날의 지루하고 밋밋한 시간들을 보상받을 흥미로운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나는 굶주린 늑대 무리에게 던져진 토끼 신세 같았다. 사실 나는 토끼띠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들이 이끄는 자리에 가 앉았다. 당황한 내 반응은 그들의 장난기를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원래 여학생들은 수줍음이 많았다. 남학생들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못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여학생들은 달랐다. 내가 등하굣길에 보던 그런 여학생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여자는 여자들과 다르다. 여자들은 여자의 복수가 아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여자들만 탄 열차 칸에 한번 타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소풍이 특별했던 것은 기차에 탔기 때문이 아니라 열차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내릴 때 여학생 한 명이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이번 일요일 12시에 역 분수대에서 만나자고 말이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나를 보며 계속 생글생글 웃던, 얼굴에 주근깨가 바닷가 모래처럼 반짝이던 여자아이였다. 약속한 날 중2 남자아이는 부산역에 나갔다. 막상 만나본 여학생은 그날 기차에서 본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열차에서 본 여학생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돌하고 말도 잘하고 잘 웃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분수대 앞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수줍음이 많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그저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주근깨가 바닷가 모래처럼 반짝였지만 이제는 눈에 들어온 모래알처럼 버석거렸다. 중2 남자아이는 실망했다. 여학생도 실망한 것 같았다.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2 남자아이는 어서 헤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고독한 영혼의 허세를 찾고 싶었다. ●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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