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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사자의 언덕’서 진군 멈춘 나폴레옹 … “비가 유럽사를 바꿨다”

중앙일보 2015.08.29 00:55 종합 12면 지면보기
워털루 기념관의 파노라마관에 그려져 있는 당시 전투 장면. 워털루 인근 벌판에서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맞붙었다. 1815년 6월 18일의 이 전투로 프랑스군 4만 명, 영 연합군 1만5000명, 프러시아군 7000명 등 6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신세계]


“만일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현장 속으로] 워털루 전투 200년, 현지를 가다
땅 질척여 공격 지연시킨 프랑스
프러시아군에 반격 기회 줘 패배
18만 명 참전, 6만 명 전사한 혈투
나폴레옹·웰링턴 두뇌 싸움도 치열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제2부 1편 ‘워털루’의 3장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위고는 적었다. “물이 몇 방울 더 많으냐 적으냐로 나폴레옹의 운명이 갈렸다. (…) 하늘을 가로질러 간, 때아닌 구름 한 조각은 세계 하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지난 15일, 벨기에 중부에 있는 소도시 워털루(Waterloo)를 찾았다. 200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1815년 6월 18일,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1세(1769~1821)는 워털루에서 영국·프러시아·네덜란드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패한 후 두 번째로 오른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유럽 지배는 끝나고,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촉발된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었고 유럽의 지도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워털루 벌판에서 10시간 동안 벌어진 하나의 전투가 유럽사·인류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기자와 함께 이곳을 찾은 건 한국 대학생 20명. 신세계가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인문학 프로그램 ‘지식향연’에 선발된 ‘청년영웅단’ 2기 학생들이다. 이들은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맞아 ‘세상을 바꾼 청년영웅, 나폴레옹’을 테마로 서유럽 곳곳에 있는 나폴레옹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파리 개선문, 나폴레옹이 잠들어있는 앵발리드 등을 거쳐 워털루에 도착했다. “어? 오늘 나폴레옹 생일이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누군가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왼쪽부터 워털루 기념관의 마네킹으로 꾸민 나폴레옹과 부하들의 작전회의 장면,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관, 사자의 언덕 사자상 아래서 벌판을 바라보는 신세계 ‘지식향연’ 참가 대학생들.


 워털루 벌판 중심에 있는 ‘사자의 언덕(Butte du Lion)’을 오른다. 비 때문에 계단이 미끄럽다. 올라서니 사방이 드넓은 벌판이다. “결전의 날 나폴레옹은 날씨 때문에 공격을 지연시킵니다. 땅이 질척여서 진군이 어려우리라 판단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블뤼허의 프러시아 군대가 워털루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셈이 됐어요. 의도치 않은 실책이었죠.”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유럽 탐방에 나선 역사저술가 송동훈(45)씨가 언덕 한편에 있는 군사 배치도를 들여다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폴레옹의 패전은 개인의 오만 때문?=워털루 전투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박빙의 승부였다. 사령관들의 치열한 두뇌 싸움과 전술적 판단, 엎치락뒤치락했던 혼전은 지금도 역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6만9000병력과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 연합군 6만7000명이 맞붙었고, 말 3만5000마리와 대포 500문이 동원됐다.



 전투는 오전 11시25분쯤 프랑스군이 연합군이 포진한 몽생장(Mont-Saint-Jean)을 향해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포격과 동시에 프랑스군이 진격했다. 웰링턴의 군대는 산등성이에 횡대로 포진해 프랑스군을 맞았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됐고 오후 5시가 되자 견고하던 연합군은 프랑스 기병의 돌격에 밀리는 듯했다. 위기에 처한 웰링턴을 구원한 것은 워털루에 당도한 4만8000명의 프러시아군이었다.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러시아군의 합류로 연합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되고, 프랑스는 근위대까지 투입하며 최후의 결전을 펼쳤지만 결국 퇴각한다.



 전투 200주년을 맞아 사자의 언덕 아래에 문을 연 워털루 기념관은 그림과 지도,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관람객들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이해하도록 안내한다. 전투 과정을 찍은 3D 극영화도 상영 중이다. 연구자들은 이날 나폴레옹이 여러 가지 전략적 오판을 했다고 말한다. 농가에 소수의 병력을 배치해 프랑스군을 끌어들인 웰링턴의 ‘미끼’에 말려든 것, 3만 병력을 이끈 그루시 후작에게 프러시아군을 계속 뒤쫓도록 명령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본대를 지원할 병력이 부족하게 된 것 등이 대표적인 실책으로 꼽힌다. 다혈질인 네 원수에게 좌익을 맡긴 ‘인사상의 실수’도 지적된다.



 기념관 중앙에는 나폴레옹이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하는 모습이 마네킹으로 재연돼 있다. 나폴레옹은 입을 꾹 다문 심각한 표정이다. 송동훈 작가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폴레옹의 오만과 실수, 잘못된 인물 기용이 패배를 불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워털루에서 이겼다면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가 가능했을까요. 1808년 스페인 원정에서 실패했을 때부터 나폴레옹에겐 몰락의 징후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나라뿐 아니라 개인과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락에는 늘 징후가 있기 마련이죠.” 워털루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이전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더 이상의 승리는 어려웠다는 의미다.



워털루 벌판 한가운데 있는 ‘사자의 언덕(Buttedu Lion)’. 계단 226개를 올라가야 한다.


 ◆승자와 패자, 다른 기억=워털루 전투의 피해는 컸다. 양측 합쳐 6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올해 6월 18일 사자의 언덕에서는 유럽 각국의 왕족과 전투에 참여했던 프랑스·영국·독일·네덜란드·벨기에 군인의 후손들이 참석해 워털루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워털루 평원에서는 당시의 전투복을 갖춰 입은 5000명의 자원자들과 말 360마리, 대포 100문이 동원된 모의 전투도 펼쳐졌다. 유럽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장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200주년을 맞는 각국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영국에서는 윈저궁을 비롯해 곳곳에서 워털루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6월에는 벨기에가 사자의 언덕 모습을 담은 워털루 200주년 기념주화를 발행하려 하자 프랑스가 이에 반발하는 일도 있었다. 이미 통합의 길에 들어선 유럽이지만, 아직도 민족의 기억은 유효하다.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나폴레옹은 유럽의 근대화를 앞당긴 주역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관리를 선발했고 모든 국민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세계의 근대법과 행정체계는 그의 아이디어에 기반을 뒀다. 나폴레옹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역사는 그가 가리켰던 곳을 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은 역사가 향하는 방향을 읽어내고 구체제에 계속해서 도전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 청년들이 그런 도전정신을 배웠으면 한다”고 송 작가는 말했다. 한 영웅의 삶과 업적을 돌아본 대학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창훈(경북대 영어교육과 4학년)씨는 “개인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제대로 갖춰진 시스템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유리아(건국대 국제무역학과 4학년)씨는 “근대의 뿌리가 된 장면들을 현장에서 접하면서 세계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위 책에서 나폴레옹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람의 소멸이 필요했다.”



워털루(벨기에)=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S BOX] 워털루는 영국군 주둔 마을 … 실제 전투는 5㎞ 남쪽 ‘몽생장 고지’



나폴레옹의 최후 전투가 벌어진 곳은 사실 워털루가 아니었다. 워털루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몽생장 고지였다. 이날 워털루 마을에서는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워털루 전투’로 불리게 된 것은 승자의 선택이었다. 워털루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웰링턴은 승전 후 이곳의 이름을 따 ‘워털루 전투’라고 명명했다. 영국군 총사령부로 사용된 건물은 현재 ‘웰링턴 기념관’이 됐다. 기념관에는 웰링턴이 전투에서 이긴 후 여왕에게 승전을 알리는 편지를 썼던 책상이 남아 있다.



 패전국인 프랑스는 처음 실제 전투가 일어난 곳의 지명을 따 ‘몽생장 전투’라고 불렀지만 차츰 영국의 표기를 따르게 됐다. 독일에서는 자신들의 지원으로 이긴 이 전투를 ‘아름다운 동맹 전투(Schlacht bei Belle-Alli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블뤼허와 웰링턴이 승리 이후 처음으로 재회한 여관의 이름이 ‘La Belle Alliance’였기 때문이다. 프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블뤼허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프랑스에 맞섰다는 의미를 살려 ‘아름다운 동맹 전투’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전투 중 나폴레옹의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던 이 여관은 현재도 나이트클럽으로 사용 중이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전투는 차츰 ‘워털루’라는 명칭으로 정착된다. 다른 명칭에 비해 영어권 사람이 쉽게 발음할 수 있었던 게 큰 이유라는 설도 있다. <참고 : 위키피디아, 『빅토르 위고의 워털루 전투』(책세상), 블로거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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