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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여성용 훈장 메달은 왜 훨씬 작아야 하나

중앙일보 2015.08.29 00:06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이사장
8월 26~28일 아태 젠더서밋(Gender Summit)이 열렸다. 2011년 유럽에서 ‘평등으로 고품질 과학과 혁신’을 이루자며 출범한 후 북미·아프리카를 거쳐 서울로 왔다. 여성 과학기술계가 공들여 유치한 이번 6차 회의엔 40여 개국 600여 명이 모였다. 이번 의제 가운데 과학기술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은 연구에서 젠더 개념이 빠짐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히는 프로젝트다. 그로써 연구와 엔지니어링의 질을 높이고, 여성의 아이디어와 혁신으로 새 비즈니스를 일구고, 사회적 수요에 더욱 부응하는 연구로 바꾸자는 것이 목표다.



 스탠퍼드 대학의 시빙어(L Shiebinger) 교수의 연구는 이미 소개됐었다. 신약 개발에서 세포·조직과 동물실험에 수컷을 많이 써서 여성에게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것 등이다. 최근 네덜란드 킹마(D Kingma) 교수팀의 냉방온도 기준도 화제였다. 남성은 21도, 여성은 24도가 편안하다, 그런데 실내온도 기준은 1960년대 70kg 체중의 40대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니 성 차이를 반영한다면 에너지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요지다. 기술표준도 젠더 개념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나 자신의 경험으로 지난 4월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급)을 받았는데 남성 수상자보다 훈장 메달과 어깨띠가 훨씬 작았다. 사진을 보고 언론사가 취재한 결과 60년대에 여성용은 작게 만들도록 규정했다는 것이다. 친절한 배려로 인해 그 아래 등급의 훈장을 준 셈이다. 개정한다니 훈장 크기의 성 차별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는 촌평까지 들었다.



 젠더혁신은 “과학 속의 여성은 왜 그리 소수인가?” “이런 현상이 지식체계와 연구성과 확산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등의 물음과 맞닿아 있다. 여성은 20세기 중반까지도 과학자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기로 된 마리 퀴리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Academy of Sciences) 회원 선출에서 탈락한 것은 극적인 예다. 두 개 과학 분야에서 두 번 노벨상을 받은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퀴리는 무선통신의 남성(E Branley)에게 밀렸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여자인 게 탈이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회원은 62년, 최초의 여성 정회원은 79년에서야 나타난다. 삼색기가 상징하는 자유(청색), 평등(백색). 박애(적색)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편 근대과학 성립에서 라이벌 관계였던 독일의 경우는 이채롭다.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화학 박사, 과학아카데미 물리화학 중앙연구소에서 12년간 일했던 동독 출신 여성과학자, 바로 앙겔라 메르켈이 2000년 정치 입문 이후 최초 여성 총리로서 12년(2005~2017)간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소개된 ‘하버드 컴퓨터’도 얘깃거리다. 별명은 피커링이 거느린 하렘(Pickering’s Harem)이다. 1877년 이 대학 천문대 소장 피커링은 별의 관측 데이터를 분류하는 일에 여성을 투입한다. 남성 조수들이 빈둥거리자 “차라리 우리 집 가정부가 낫겠다”며 진짜 가정부(W Fleming)를 데려다 쓴 것이다. 단순작업이니 여자도 할 수 있고 사무직 노동자보다 쌌으니(시급 25~50센트) 딱 좋았다.



 이 인간 컴퓨터 사단이 1890년 1만 개 이상 항성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헨리 드레이퍼 카탈로그를 선보인다. 소리 소문 없이 항성 관측과 분광 천문학의 기초를 닦는 일을 해낸 것이다. 하렘을 거쳐 간 일꾼 가운데 리빗(H S Leavitt)은 그의 세페이드(Cepheid) 변광성 연구에 경탄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가 1924년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서류를 꾸미던 중 3년 전에 암으로 사망했음이 확인된다. 애석하게도 20년대 여성 수상자를 놓친 것이다. 35년 마리 퀴리의 딸 이렌 퀴리 이후 47년과 63년에 여성 수상자가 나타난다. 1901년에 시작된 노벨상 역사에서 여성은 가뭄에 콩 나기로 3%다.



 오늘날의 상황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러나 ‘유리천장’과 ‘새는 파이프라인’의 고질적 현상을 타개하는 일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여성계의 문제로만 보는 한 해결책은 제자리걸음이 될 것이다. 모든 부문에서 어떤 정책으로 얼마나 효과를 거두느냐가 열쇠다. 젠더 격차 지수가 우리보다 좀 나은 일본 도쿄에서도 8월 28일부터 아베 총리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세계여성총회(World Assembly for Women)가 열리고 있다. 총리 부인도 토론에 참여한 도쿄 프린스 호텔 회의장 분위기가 사뭇 뜨겁다. 한국 대표로 젠더 이슈 해결을 위한 논의의 장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희망 찾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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