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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아바나에서 들은 한국어 ‘7.2’

중앙일보 2015.08.25 00:07 종합 30면 지면보기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쿠바 주재 미국 대사관이 정식 개설되는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쿠바를 찾았을 때 겪은 일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쿠바의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다. 오후 들어 다리는 풀리고 피곤이 홍수처럼 밀려와 우리의 박카스에 해당되는 레드불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시내의 편의점을 찾았다. 그런데 스페인어를 모르니 점원이 가격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여는데 갑자기 “칠점 이”라는 말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젊은 쿠바인 점원이 한국어로 “7.2”라고 발음했는데 음료수 세 캔의 값이 7.2세우세(쿠바 화폐 단위)라는 얘기다. 영수증(사진)을 건네받고 나오면서도 황당했다.



 전날 쿠바에 퍼진 한류를 취재하기 위해 시내의 한 DVD 판매점을 들렀는데 사전에 조율해서 간 곳이 아니었다. 현지 교민의 안내로 찾긴 했지만 교민과 가게 주인이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교민이 기억하기에 그 DVD 판매점이 당시 우리가 있던 장소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워 시간을 아끼기 위해 찾았을 뿐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할리우드 영화만 눈에 띄어 내심 실망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행인들의 시선을 가장 잘 끌 수 있는 가게 입구에 진열했고, 할리우드 영화는 가게 안으로 밀어 넣은 거였다. 쿠바인 주인의 말이 더 놀라웠다. “할리우드 영화보다 한국 드라마가 더 잘 팔린다. 다른 데 가서 물어봐도 똑같을 거다”였다. 그 전날 오후 미국 대사관 맞은편에 작은 사무실을 차린 이른바 한류 클럽을 찾았을 땐 나도 모르는 한국 아이돌의 사진으로 벽이 도배돼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젊은 쿠바 여성은 요즘 인기 있는 한국 아이돌이 누구누구라고 말해줬는데 기자인 내가 모르는 이름들이라 지면에 담지 못했다.



 아바나를 떠나기 이틀 전 북한 대사관을 가봤다. ‘꾸바 공화국 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사관’ 앞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대사관 담 벽엔 김일성 주석이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으로 보이는 수십 년 전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미국과 국교 정상화에 성공한 쿠바와 미국과 대결을 고수하는 북한의 차이는 무엇일까. 쿠바는 관광으로 먹고살아야 하지만 북한은 그럴 자산이 없고, 핵이 있고 없고의 차이도 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한류가 가장 큰 차이다. 쿠바는 한류를 즐기고, 북한에선 한류로 집안이 망한다. 북한이 한국을 자본주의 날라리풍을 불어넣는 체제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한 남북 관계는 항상 외줄 타기처럼 위태위태하다. 대북 방송 확성기를 날려버리겠다며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는 사태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아바나를 떠나는 날 평양은 언제 변할까를 생각하며 그렇게 착잡할 수가 없었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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