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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의 시시각각] ‘하면 된다’에 머물러 있는 한국 외교

중앙일보 2015.08.24 00:07 종합 30면 지면보기
박승희
정치부장
“아이고, 참말로 나 원 없이 고생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지겹고, 슬프고, 진절머리가 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콱 막힐 때가 있다. 중앙일보가 8월 14일 시작한 ‘일본군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이 그랬다. 70년 전, 80년 전의 할머니로 돌아간 내 전지적 상상 때문이었다. 나라가 망했다.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는 열여섯 살 소녀와 무관하다. 그런데도 소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딸로, 누이로 평화롭게 살던 삶은 짓밟혔다. 대신 악몽이 현실로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 숨이 막혔다.



 할머니들의 사연이 실린 다음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전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아베의 담화는 110년 전 조선을 강제 병합할 때처럼 교묘했다. “전장의 그늘에 많은 명예와 존엄을 훼손당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선 안 된다”며 ‘일본군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을 언급한 대목도 그랬다. 아베는 이 문장 바로 앞에 이런 말을 했다. “중국·동남아·태평양 섬 등 전장이 된 지역에선 전투뿐 아니라 식량난 등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시달리며 희생됐다.”



 ‘전장의 그늘’과 ‘전투뿐 아니라 식량난 등으로’란 표현이 대구(對句)로 등장한 게 우연일까.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와 속죄를 하지 않고 있다. 증명된 역사가 아니라는 핑계에서다. 그래서 아베의 담화는 2007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광고 문구와 맞닿아 있다. 당시 미 하원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상정되자 일본 의원 47명은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 행위”라는 광고를 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 속 사실은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돼 전달된다”(『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고 꿰뚫었다. 승자의 왜곡이 담겼다는 얘기다. 아베의 2015년 담화엔 여전히 승자의 굴절이 담겼다.



 교묘함은 분노를 부른다. 하지만 분노는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감정이다. 화내는 것만큼 쉬운 건 없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대할 때 우린 더 냉철하고, 더 교묘하고, 더 미래적이어야 한다. 망하지 않는 나라가 갖춰야 할 필요충분 조건들을 갖춰야 한다.



 그중 하나가 외교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사 망언들을 접할 때마다 들끓는 여론은 미래가 아니다. 분노는 드러내지 않을 때 더 무섭다. 정작 문제는 쉬 끓는 우리가 일본과의 외교전에 들이는 심적·물적 투자가 1970년대 ‘하면 된다’ 수준을 벗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 외교의 큰손들이 몰린 워싱턴에서 공공외교에 쓰는 돈이 한국 정부는 1년에 37억원이고, 일본 정부는 906억원이다.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을 담당하는 동북아과장은 5년째 자리를 지키는데 우리 동북아과장은 1년~1년 반짜리다. 전 세계 외교 현장에선 국제법 논리 대결이 펼쳐지는데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고, 엘리트 코스도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 외교엔 국제법 전문가가 사라지고 있다(본지 8월 14일자 6면).



 우리는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다. 그러는 사이 “물에 젖는 스펀지 같은 일본 외교”(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뉴욕 거주)는 워싱턴을 소리 없이 적시고 있다. 한국에 인색한 아베가 미국엔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4월 30일 미 의회에서 한 상·하원 합동연설이다.



 “세계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의 리더십 없이 있을 수 없다” “미국이 세계경제에 자유를 키웠을 때 최대의 이익을 얻은 건 일본이다. 80년대 이후 한국·대만·중국이 발흥했을 때 이번엔 일본이 자본과 기술로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표해 지난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미국인들의 영혼에 깊은 절을 올린다”.



 워싱턴 외교에서 미국인들의 인권을 깨우고 일본의 핸디캡이 돼온 ‘일본군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올해만 여덟 분이 숨져 생존자는 마흔일곱 분으로 줄었다. 다시 숨이 막혀온다.



박승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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