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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산책 - ‘마지막 선비’ 김창숙] 이만한 분 있기 위해 500년…

중앙일보 2015.08.22 16:47
심산 김창숙 유영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籌謀光復十年間 性命身家摠不關 磊落平生如白日 何須刑訊故多端)."



일제의 악독한 고문에 전쟁포로 대접을 하라며 호통치다 끝내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자호를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했다. 총독부에 등 돌려 집을 지은 한용운 선생, 일제 치하에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꼿꼿세수’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일제 강점기 ‘3절(三節)’이라 불린 심산의 한시를 접하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진다. 광복 70년, 경술국치 105년이 되는 달이니 더욱 그러할 터. 시대가 더할수록 심산의 일생과 정신에서 광휘를 느낀다.



심산은 1879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62년 83세로 타계하기까지 우리 민족사상 가장 험난한 시기에 꺾이지 않는 투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五賊)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주장하자 그들을 배척하는 건의서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나라가 망한 후 술과 방랑으로 광인처럼 지내다 3·1운동 민족대표에 유림만 빠진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동분서주했으며,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갖고 상해로 망명했다. 이렇게 된 데는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는 것이 선비의 의무”라는 어머니의 엄한 채찍이 있었다.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케 한 것이 500여 명이 체포된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그 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한때 만주독립군 군사부고문을 맡았다. 나석주 의사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케 했다. 이에 자금을 제공한 유림인사 600여 명이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심산은 20여 년에 걸친 네 차례의 투옥과 고문에도 백절불굴의 표상이었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와 남한 단정 수립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피폐된 성균관 조직을 재정비해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교육사상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총칼 앞에서도 김일성과는 죽어도 함께할 수 없다고 저항했으며, 독재를 굳혀가는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하야를 촉구하는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1958년 아시아경기 운동장을 건립한다는 명분으로 일곱 분의 순국선열의 혼이 잠든 효창공원을 교외로 이전하려 하자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1인 시위’를 벌였다. 그 덕분에 그나마 현재의 추모공원이 유지될 수 있었다. 1962년 7월 치러진 그의 사회장에서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은 “선생의 일생은 건국의 공로로 새겨진 명예의 상처로 엮어졌으며 대쪽같이 강직한 선생의 애국심은 항상 국민의 대변자로서 국정을 바로 비판했다”는 추모사를 했다.



시인 고은은 '김창숙'라는 제목의 시에서 심산을 명징한 칼처럼 이렇게 정의했다.



“긴 세월/ 16년 감옥살이/ 고문으로 다리병신 되어/ 제 걸음 걷지 못하는 세월/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 하늘 놀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나이 눈물 있고/ 사나이 노기 있고/ 사나이 쓰라린 기상 있다…”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니. 선생이 아닌 그 누가 이런 상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김창숙문존』을 덮으며 선생의 유영(遺影)을 응시해 본다. 금방이라도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호통이 튀어나올 듯하다. 광복의 달이자 민족 수치의 달에 마지막 선비다운 단호한 존안을 바로 보기가 겸연쩍다. 삼가 옷깃을 여민다.



최영록 한국고전번역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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