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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0> 공산당원 아니지만 민족 영웅으로 떠오른 먀오커슈

중앙일보 2015.08.22 16:42
동북대학 재학 시절,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섞여 모습을 남긴 먀오커슈(셋째줄 왼쪽 여섯번째) 1933년 4월 베이핑(北平·현재의 베이징)



열 다섯에 토비 토벌 나선 난세 영웅
장쉐량 극찬 속 최우수로 대학 졸업
지사 제의 거절하고 의용군에 합세
철혈군 400명으로 일본군에 큰 타격

난세는 조화 덩어리다. 대 전략가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가 하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학문으로 일생을 마치고도 남을 사람이, 전쟁터를 전전하다 후손들에게 영원한 회자 거리를 남기고 삶을 마감한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민족 영웅 먀오커슈(苗可秀·묘가수)는 집안도 좋았지만 어릴 때 좋은 교육을 받았다. 동북3성 보안위원이던 부친은 자녀 교육을 제일로 쳤다. 산둥(山東)까지 가서 선생을 모셔왔다. “자식 교육은 남에게 맡겨야 제대로 된다. 직접 시키겠다고 팔 걷어 붙이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다. 교육은커녕 부자지간이 원수로 변하기 십상이다. 나 대신 네가 잘 교육 시켜라. 두들겨 패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 사람은 말년과 죽을 때가 제일 중요하다. 그걸 알려면 어릴 때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애가 자라면서 오만해 지면 네 탓으로 알겠다. 그땐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너를 죽여 버리겠다.”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녀들에게도 신신당부했다. “밭에서 태양과 씨름하지 마라. 남는 게 없다. 커서도 돼지 키울 시간 있으면 책과 씨름해라. 공직자 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일부를 제외하곤 전부 도둑놈들이다.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평소 말은 번듯하게 잘하지만, 나라가 위기가 처했을 때 책임감이 뭔지를 모르는 망종들이다. 옛 사람의 글을 숭상하되 새로운 것을 배척하지 말고, 무(武)을 중요시 여기되 거칠어 지지 않도록 노력해라.”



먀오커슈는 선생과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열 다섯 살 때 토비(土匪)들이 마을을 습격하자 대장간을 운영하던 숙부를 찾아갔다. 큰 칼과 창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동북은 아수라장이다. 러시아가 떠나자 섬나라 원숭이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 숙부는 조카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먀오커슈는 친구 50명을 모아 소년습무단(少年習武團)을 조직했다. 엄마가 준 돈으로 엽총도 십 여 자루 사들였다. 여가 시간에 무술과 사격을 연마했다. 다시 마을에 나타난 토비들은 소년습무단의 적수가 못 됐다.



명문 동북대학(東北大學)에 입학한 먀오커슈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학생이었다. 남들이 다 가입하는 구국회(救國會· 동북의 대표적인 청년조직)에 이름은 올렸지만 행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학업에만 전념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동북대학은 베이핑(北平·현재의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베이징대학 한쪽 구석에 간판을 내건 동북대학 졸업식 날, 교장을 겸하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마오커슈에게 최우수상을 줬다. 수여 이유도 설명했다. “모든 과목에 성적이 우수하고, 4개 국어에 능통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졸업논문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순자(荀子)와 손자병법에 관한 연구를 꼼꼼히 읽어봤다. 모범적인 졸업논문이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동북 최대의 도시 선양에 진입한 일본군. 1931년 9월 19일 오후.




대학 문을 나선 먀오커슈는 졸업장과 상장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현(縣) 지사(知事)로 나가라는 정부의 제의도 거절했다. 베이징대학 재학생 처우다펑(鄒大鵬 ·추대붕, 당시 중공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당원으로 자처했다. 훗날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정보부장과 국무원 정보총서 책임자를 역임했다. 한동안 신 중국의 정보분야를 총괄했다)과 함께 덩톄메이(鄧鐵梅·등철매)가 지휘하는 요동삼각지의 의용군에 합세했다. 아버지에게는 간단한 편지를 보냈다. “스승과 아버지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항일 구국에 투신할 생각입니다.” 먀오의 아버지는 한숨만 내쉬었다. 옆에 있던 부인이 내용을 묻자 거짓으로 둘러댔다. 제대로 말했다간 “너는 하지도 못할 일을 애한테만 강요하더니 귀한 자식 잃게 생겼다”며 난리를 부릴게 뻔했다.



덩톄메이는 먀오커슈을 의용군 참모장에 기용했다. 먀오의 근황이 알려지자 소년습무단 단원들도 하나 둘 의용군에 가담했다. 먀오는 이들을 근간으로 ‘소년철혈군(少年鐵血軍)’을 출범시켰다. 간단한 구호도 만들었다. “백성을 아끼고 보호한다. 경찰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 의용군과 단결해 일본인을 타도하자.”



철혈군은 400명에 불과했다. 외부에는 덩톄메이를 경호하는 학생병으로 알려졌지만 전투력은 동북의 어느 의용군보다 강했다. 무기와 식량 부족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400일간 100여 차례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일본의 괴뢰였던 만주국은 철혈군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국적 먀오커슈(國賊 苗可秀)”라는 홍보물을 살포했다.



먀오커슈는 융통성이 많았다. 중공당원이 아니었지만 중공이 자랑하는 항일영웅 양징위(楊靖宇·양정우)와도 연합을 모색했다. 양징위도 먀오의 배짱이 맘에 들었다. 일본군으로 위장시킨 참모와 조선인 전사(戰士) 20여명을 철혈단에 파견했다. 일본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성사는 안됐지만 관계는 돈독해졌다. 먀오커슈와 중공의 관계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공과 손잡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음영(陰影)이 철혈군 주위를 떠돌기 시작했다.



덩톄메이가 죽자 요동 삼각지의 자위군은 먀요커슈을 2대 지도자로 추대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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