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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왜 스스로 볼모가 되려 하는가

중앙일보 2015.08.22 00:0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이후백(李後白)은 조선 중종~선조 연간의 명신이다. 도승지를 오래 하고 이조와 호조판서까지 지냈는데 집이 가난한 선비네처럼 늘 적막했다. 부정한 청탁을 받으면 당장 교제를 끊고 친구라 할지라도 자주 찾아오면 마땅히 여기질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평생 사욕을 버리고 공도를 좇은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인재를 추천할 때 신중에 조심을 더했다. 늘 여러 의견을 들었고 인사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내가 임금을 속였다”며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친척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말끝에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했다. 이에 후백은 바로 낯빛을 고치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장차 벼슬을 시킬 사람들 명단이었는데 친척이 보니 자기 이름도 있었다. 후백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천거하려 했는데 지금 자네가 청탁을 넣는 바람에 할 수 없게 돼버렸네. 사람들이 내가 청탁을 받고 벼슬을 준다고 수근대지 않겠나.”



 이런 그를 두고 동인(東人)의 중심인물 김효원은 “도량이 좁아 재상은 할지언정 정승 재목은 못 된다”고 비꼬았다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늘날에 비춰봐도 대부분의 문제가 인사 잘못에서 비롯됨이 증명되고 있고, 천재(天災)의 경우마저 용인(用人)이 어땠는가에 따라 사태 수습 결과가 천양지차인 걸 봐도 인사는 그야말로 고심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만사(萬事)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문제가 된 두 여야 국회의원 아버지의 자녀 인사청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실업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청년들의 좌절보다 더 큰 이유에서다. 사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나름의 인사정책이 있다. 향후 수년에 걸쳐 시행될 정책 방향에 따라 인사 수요를 예측하고 걸맞은 기준을 설정해 인재를 뽑는다. 거기에 제3자가 개입하는 건 기업이나 기관의 정책 설정을 무력화하고 시장을 교란하는 중대범죄다. 이른바 ‘빽’으로 채용된 사람이 자격을 갖췄건 못 갖췄건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볼모가 되기 때문이다. 청탁이 없더라도 기업이나 기관들이 유력자의 자제들을 앞다퉈 데려가려 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언제든 반대급부가 없을 리 없는 까닭이다.



 아비는 그렇다 쳐도, 젊은이가 그것도 제법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왜 스스로 볼모가 되려고 ‘음서(蔭敍)’에 기대는지 모르겠다. 제 자식만 귀한 줄 알아 힘 미치는 곳이면 염치불고 전화 버튼을 누르는 힘센 아비보다, 그 힘이 제 것인 양 여기나 저기나 함부로 휘둘러지기를 고대하는 자식이 더 딱하다. 아비의 힘이 영원할 리 없고 볼모의 운명도 따라 꺾일 게 분명한데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좋은 예가 있다. 후백보다 38년 앞선 조광조 얘기다. 그 역시 어릴 적부터 성품이 곧고 학식이 높았다. 그러한 행실이 널리 알려져 추천으로 사지(司紙) 자리를 제수 받는다. 사지란 조지서에서 종이 만드는 일을 관리하는 종육품 벼슬이다. 당시에는 나름 중요한 보직이었겠으나 조광조 같은 이한테 성이나 찼겠나.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작록을 구하지 않는데도 벼슬을 주니 차라리 과거를 거쳐 나와 임금을 모시는 게 옳겠다.” 이후백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가 전하는 바다.



 말은 그래도 ‘특채’로 시작해서야 뜻을 크게 펼 수 없음을 잘 안 것이다. 몇 년 후 조광조는 당당하게 과거에 합격해 옥당(玉堂)에 진출한다. 비록 모함을 받아 날개가 꺾였지만 500년 지난 지금까지 빛나는 이름과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던 힘이 거기서 나왔다. “자기 실력이 아니라 부모의 명성으로 대접 받고 그것을 즐기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다”는 플라톤의 말도 다른 얘기가 아니다. 자기로 모자라 자식에게까지 그 부끄러움을 넘겨주는 것 역시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이 땅의 힘센 부모와 유약한 자식들이여, 그 몰염치와 시한부 영화(榮華)의 세습 고리를 끊을지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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