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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기술 장터 있어야 벤처가 산다

중앙일보 2015.08.22 00:0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현승
코람코자산운용 대표·전 SK증권 사장
『늙어 가는 대한민국』 저자
626억원 vs 1조2000억원. 무려 스무 배 차이가 나는 이 숫자는 무엇일까.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인 한국의 ‘김기사’와 이스라엘 ‘웨이즈(Waze)’의 매각가다. 김기사는 다음 카카오에, 웨이즈는 구글에 각각 팔렸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스라엘의 이갈 에를리흐(Yigal Erlich) 요즈마펀드 회장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김기사가 이스라엘 기업이었다면 10배는 더 받고 팔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웨이즈가 이스라엘의 800만 인구를 대상으로 한 데 비해 김기사는 4000만 명이 훨씬 넘는 한국인에게 정확하고 빠른 서비스를 하게끔 설계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도 무엇이 스무 배가 넘는 매각가 차이를 낳았을까. 필자가 2013년 이스라엘의 벤처캐피털사를 방문했을 때 대표적 투자 성공 사례로 웨이즈를 소개받았다. 당시 웨이즈는 한국의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인 T-map이나 김기사에 비해 기술적 측면에서 별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차이는 기술이나 회사 자체가 아니라 벤처 생태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벤처는 유대인의 정치·사회적 네트워크와 투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했다. 처음부터 미국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물론 웨이즈의 모든 서비스는 영어로도 제공됐다.



 비슷한 기술이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그 기술을 둘러싼 시장과 환경이 좌우한다.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의 몸값이 높아지려면 시장을 조성하고 투자자 네트워크 형성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정부가 창조경제의 일환으로 기술금융을 추진해 나름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14년 7월부터 2015년 4월까지 약 열 달간 총 3만9685건, 25조8000억원이 대출됐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부동산담보대출 등에 익숙한 금융권에 기술담보대출은 머리 아픈 과제다. 은행 대출 담당자 입장에서는 보신주의로 몸을 사린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렵지만, 부실 대출로 책임져야 할 상황에 대한 걱정 또한 항상 뒷머리를 당긴다.



 부동산담보대출은 버블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쉽다. 담보인 부동산에 대한 평가가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데이터도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담보대출은 기술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다. 은행의 대출 담당자가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시장과 환경에 따라 기술의 가치에 대한 평가 금액이 달라진다. 그나마 기술신용보증기금 등 기술신용평가기관(TCB·Tech Credit Bureau)이 발행한 기술평가서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대출 담당자의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최근 기술금융 신청 수요가 증가하고, 기술평가서 발급에도 시간이 많이 걸려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적기 공급이 어려워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기술을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을 은행 내부에서 키워야 한다.



 기술을 담보로 잡으면 대출을 회수해야 할 때도 골치가 아프다. 기술신용평가기관에 의하든 은행의 자체 평가에 의하든, 담보로 잡았던 기술을 팔아 대출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손해를 보더라도 담보를 팔 수 있어야 은행 입장에선 악성 부실 대출이 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출구전략(exit strategy)이 마련돼야 한다. 부동산담보대출의 경우 담보인정비율(LTV) 제한 같은 장치가 있어 부실 대출 회수율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담보대출은 이런 계산이 어렵다. 미국처럼 시장에서 지적재산권(IP)의 가치가 결정되고 거래가 활발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하지만 한국에선 기술 거래 시장이 충분히 조성돼 있지 않다. 싼값에라도 기술을 매입해 줄 수 있는 기관도 없다. 외환위기 때 기업의 부실 자산을 대거 매입해 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한 곳이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다. 이 공사의 역할을 통해 부실 자산 시장의 필요성과 시장성이 확인된 덕분에 현재는 부실 자산을 처리하는 기관이 많이 생기고 부실 자산을 거래하는 시장도 활발해졌다. 기술 분야에서도 담보로 묶여 있다 매물로 나오는 기술을 매입해 줄 기관이 필요하다. 이는 지적재산권의 전반적인 거래 활성화와 부가가치가 높은 새로운 기술이 활발히 태어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금융기관의 보신주의를 비난한다고 벤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적정한 가격으로 기술을 평가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매각을 통해 탈출할 수 있으며, 매입한 기관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기술금융에서 은행 대출보다 벤처캐피털 같은 기술모험자본의 비중을 늘려 가는 것이 벤처 및 기술금융을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현승 코람코자산운용 대표·전 SK증권 사장·『늙어 가는 대한민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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