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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요일] 임신 위한 또 다른 선택

중앙일보 2015.08.20 00:24 종합 22면 지면보기
디자이너 김지연(가명·39)씨는 일에 빠져 지내다 결혼 적령기를 놓쳤다. 김씨는 2년 전 자신의 난자를 산부인과 병원의 난자은행에 맡겼다. 마흔이 넘으면 임신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당장 결혼할 상대는 없지만 늦더라도 결혼은 할 것이고, 아이도 낳을 생각이다. 그는 난자를 채취한 뒤 냉동 보관하는 방법을 택했다. 김씨는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결혼이 더 늦어지면 아이를 못 갖는 게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건강한 난자를 보관해 놓으면 임신을 원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항암치료 받은 30대 출산 성공
22세에 냉동 보관한 난자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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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처럼 젊고 건강할 때 난자와 정자를 미리 채취해 냉동 보관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중에 자연임신이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려는 목적이다. 특히 젊은 암환자가 항암 치료에 앞서 난자나 정자를 보관하는 사례는 꽤 보편화됐다. 박찬우 제일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예전엔 젊은 암환자들이 암은 이겨냈지만 생식 기능을 잃어 아이를 원해도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엔 난자·정자 냉동보관술이 발달해 그럴 염려가 줄었다”고 말했다. 방사선 치료 등 항암 치료는 빠르게 생장하는 세포를 집중 공격하는 방식으로 암세포를 잡는다. 하지만 이때 여성의 난소나 남성의 고환도 타격을 받는다. 주기적으로 난자와 정자를 생산하는 세포 활동을 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과거엔 암 치료의 초점이 오로지 ‘생존’에 맞춰져 있었지만 요즘엔 완치 뒤 ‘삶의 질’로 옮겨 갔다”며 “완치 뒤 출산을 원한다면 냉동보관술을 권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백혈병에 걸린 여성이 난자를 보관해 뒀다 9년 만에 출산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주부 안모(36)씨는 22세 때인 2001년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전신 방사선 치료와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영영 임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미혼이던 안씨에겐 아기를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말이 죽음의 공포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치료 전 난자 를 빼 냉동 보관하기로 했다. 과배란을 유도하는 주사를 맞은 뒤 난자를 채취했다. 그 뒤 액체 질소를 이용해 영하 196~210도까지 급속 냉동하는 ‘유리화동결법’을 썼다.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유상우 교수는 “동결 보존액이 난자 안으로 들어가 유리처럼 순식간에 굳히는 방식”이라며 “이렇게 보존하면 나중에 해동해도 세포 기능이 잘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천천히 얼리면 세포 내 수분이 얼음 결정으로 변하면서 세포를 찔러 세포가 손상되는데 유리화동결법을 쓰면 손상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얘기다.



 안씨는 5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고, 2009년 봄엔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다. 안씨는 얼려둔 난자를 떠올리고 2010년 병원을 찾았다. 보관된 난자를 상온에서 해동했더니 7개 중 5개가 정상이었다. 의료진은 이 난자와 남편의 정자로 인공수정을 했다. 그렇게 생성된 수정란 2개를 안씨의 자궁에 이식했고, 2011년 7월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지난해 일본에선 30대 여성이 12년 전 냉동 보관한 난자로 아들을 출산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암환자뿐 아니라 결혼이 늦어진 미혼 여성들이 난자 냉동보관술에 몰린다. 미국의 페이스북과 애플은 지난 1월부터 여직원들에게 난자 냉동 비용으로 1인당 최대 2만 달러(약 2400만원)를 지원하고 있다. 우수한 여성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사내 복지 차원에서다. 남성보다 여성이 관심을 보이는 건 여성의 생식력이 남성에 비해 나이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여성의 난소 기능은 25세 때 정점을 찍고 서서히 떨어져 만 35세를 기점으로 급격히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갈수록 만혼(晩婚) 추세가 심해지는 국내에서도 난자 냉동보관술이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1994년 25.1세였던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2013년 29.6세가 됐다. 여성이 첫아이를 낳는 연령도 94년 26.4세에서 2013년 30.7세로 함께 올라갔다.



 미즈메디병원 산부인과 김나영 과장은 “최근 3년 새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전문직 ‘골드 미스’들의 문의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체외수정(시험관아기) 시술 성공률은 30세 이전엔 70%가 넘지만 만 32세에 50%가 되고 38세가 되면 30% 이하로 떨어진다”며 “젊을 때 보관해둔 난자로 시술하면 나이가 든 뒤에도 젊을 때와 비슷한 성공률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세 이전에 난자를 보관해 뒀다가 38세에 시험관아기 시술을 하면 임신 성공률이 70%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냉동보관술을 할 때는 보통 7~10개의 난자를 채취한다. 강남차병원 유 교수는 “개중에 2~3개는 냉동 보관 중에 손상되거나 해동 뒤에 수정이 잘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10개를 냉동하면 보통 체외수정 시술을 2회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즈메디병원 김 과장은 “냉동보관술로 난자를 보관해 놓은 경우 40대 중반 이후 폐경기에 접어들었어도 임신할 수 있다”며 “결혼 뒤에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고 안 됐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임신 보험’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난자 채취와 급속 동결에 드는 비용은 약 300만원이다. 여기에 1년 단위로 10만~15만원 정도의 보관료를 내야 한다. 추후에 보관된 난자로 체외수정 시술을 하게 되면 별도의 비용이 든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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