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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④

중앙일보 2015.08.20 00:22 종합 23면 지면보기
차분하게 말하다, 놀라운 진실을

시 - 박형준 ‘테두리’외 31편




테두리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물건을 사러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안고 있던 여인의 테두리를 보는 것

걸음을 멈추고 흔적을 훔쳐보듯 바라볼 때

여인의 숨내도 함께 흩어져간다



오늘과 같은 밤에는

황금빛 줄무늬를 가진

내 짐승들이

고독을 앓겠지



모든 사물의 테두리에서는 빛이 난다. 거기가 날카로운 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 사람에게 ‘테두리’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테두리에는 어떤 눈물이 맺혀 있기 쉽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 자신의 한계에 다다라서야 빛을 발하는 것들도 있다.



가령 이 시에 적힌 ‘위로의 노래’. 사물의 테두리는 또 다른 사물과의 접점이고 그 접점은 종종 새로운 사건의 시작점이 되어서일까. 우리는 자주 끝이 진정 끝이 아니라는 위로를 듣는다. 더불어 테두리가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모양새를 만지고 안고 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희한하지. 신기하게도 웬만큼 안다고 여긴 상태에서도 사람이든 사물이든 윤곽을 그려보려고 시도하면 미궁에 빠지기 일쑤이다. 알던 사람도 도통 모르겠는 사람이 되고 익숙한 사물도 돌연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테두리를 어루만져본 사람들은 대부분 고독해지기 마련이다.



 박형준(49·사진) 시인은 놀라운 진실을 차분하게 말하는 재주를 지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시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감정 속에서 세련되고 복잡한 인식에 이르는 길이 놓여 있다. 단언컨대 그와 같은 길은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작용 안에서만 가능하다. 지성에 사로잡힌 시들이 제공하는 공허한 건조함과 감성만이 넘치는 시들이 전하는 맹목적인 눅눅함, 박형준의 시는 저 둘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정신적인 억압과 육체적인 긴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너무 과한 평가일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시의 테두리에서 쏟아지는 광채에 하루를 꼬박 앓았던 사람의 말이다.



송종원(문학평론가)



◆박형준=1966년 전북 정읍 출생. 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동국대 교수. 시집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등.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불행, 정면으로 들춰내 위로하다

소설 - 김애란 ‘입동’




김애란(35·사진)은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한 세대의 삶과 질곡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작가다. 이전 소설에서 그는 힘겹게 성장의 문턱을 넘어가던 청년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곤 했다. 편의점·공무원 시험·셋방·고시원 같은 단어들을 아픈 기억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입동’에는 꿈 꿔왔던 안정된 삶의 언저리에 도달할 때쯤, 한순간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부부가 등장한다. 각기 힘겨운 청년기를 보낸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중산층’의 삶에 도달하려는 꿈에 젖어 있다. 이 부부는 가까스로 도시 외곽에 아파트 한 칸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이사한 직후 어린 외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참담한 일을 겪는다. 그의 소설은 우리 모두 막연히 감지하고 있지만 모르는 척 눈감고 있는 진실을 잔인하게 들춰낸다. 대출금, 빠듯한 수입, 도시에 산재한 위험, 만성적인 피로와 질병 등등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요소는 주변에 얼마든지 도사리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삐끗 어긋나면 언제든지 무너지고 말만큼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이라는 환상이다.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니면서 그랬다. 20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얇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갓 돋은 뿌리 하나가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에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 왔다.”



이제 이들은, 그리고 나는 또 비슷한 순간 안도하고 좌절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와 우리의 불행’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작가를 지닌 세대라면, 외로움과 슬픔을 조금은 달랠 수 있지 않을까. 김애란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소연(문학평론가)



◆김애란=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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