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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광복 80주년도 이렇게 맞을 것인가

중앙일보 2015.08.20 00:07 종합 28면 지면보기
채인택
논설위원
뜻깊은 광복 70주년이다. 하지만 한반도 주변을 둘러보면 현실은 온통 난맥상이다. 북한은 도발을 멈출 줄 모른다.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19일자 5면을 보면 기가 막힌다. 제목만 훑어봐도 ‘미친 악녀의 간악한 험담질’ ‘제 얼굴에 흙탕칠을 한 역적’ 등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 등에 대한 저주와 악담으로 가득하다. 최근 만난 한 대북전문가는 “손가락(말)을 보지 말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행동)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표현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동아시아 주변국들은 우리의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지도 아닌 상황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한국에 대한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 편이라 믿었던 미국도 부담을 준다. 삐걱거리는 한·일 관계의 책임론을 놓고 워싱턴에서 양비론이 비등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십 년간 한국에 기회가 됐던 중국은 이제 경제 불안의 요인이 될 태세다. 정부는 이에 대응할 의지도, 힘도 부족해 보인다.



 이런 상황인데도 다음에 맞을 광복 80주년 때는 통일·번영·화합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시대는 새벽처럼 그냥 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최근에 쓴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그런 사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케네디 교수는 희망을 이루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의지로 충만한 지도자가 비전과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목적 달성을 위한 구체적 전술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몰입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역사가 이를 웅변한다. 케네디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인 1943년 1월에 주목한다. 당시 나치 독일은 유럽을 거의 석권하고 있었으며 군국주의 일본은 중국은 물론 서태평양 곳곳에 일장기를 꽂고 있었다. 이런 때에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만났다. 상황에 밀리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두 지도자는 서방연합군이 앞으로 벌일 전쟁의 전략적 목적을 적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잡았다. 이를 이루기 위한 전술적 목표는 독일 잠수함에 맞서 대서양 해로를 장악하고, 나치가 장악한 중부유럽을 폭격하기 위한 제공권을 확보하며, 적이 장악한 해변에 상륙해 교두보를 만들고,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 거점을 마련하는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당시 군인들에게는 ‘미션 임파서블’, 즉 불가능한 작전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신출귀몰하는 잠수함에 대항할 전술 개발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전쟁 중 제공권을 장악하는 임무는 이전까지 어느 군인도 도전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현대 방어무기로 무장한 적 해변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는 작전을 가르치는 군사학교는 그때까지 없었다. 태평양에 흩어진 섬들을 차례로 장악하는 전술은 어느 역사책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저자인 케네디는 “놀라운 점은 1년쯤 지난 뒤 이 목표들이 대부분 달성되거나 현실화됐다”고 강조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과 실제로 불가능한 일은 달랐다 . 일단 지도자의 의지가 실린 최종 목적과 전술 목표가 정해지자 당시 엔지니어와 군인은 갖은 지혜를 다 짜내 결국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의지와 명확한 목적·목표 제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전쟁의 최종 목표가 ‘무조건 항복’으로 명확했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거나 좌고우면할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70년도 더 전의 이러한 교훈을 오늘날 대한민국이 맞고 있는 상황에 대입해 보면 흥미로운 교훈이 될 것 같다. 집권 절반을 넘는 박근혜 정부는 지금이라도 통일·평화·번영·화합의 명확한 목적과 달성을 위한 목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70년 전 민족의 의지가 실리지 않은 채 새벽처럼 갑자기 다가왔던 해방이 우리에게 분단과 전쟁의 시련을 안겨주었음을 새삼 기억할 때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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