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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아베 외교의 반격 모델

중앙일보 2015.08.20 00:07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보균
대기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말했다. “일로(日露)전쟁이 식민지 지배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말은 그의 전후 70년 담화 앞쪽에 있다. 담화는 교묘했다. 핵심은 과거사(침략·반성·식민지배·사죄) 문제다. 그에 대한 어휘 선택은 반감을 낳았다. 언어 배치는 반발을 일으켰다. 나의 눈길을 끈 부분이 있다. 근대화 원동력, 러일(일로)전쟁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이다. 유신은 러일전쟁 승리(1905년)로 완결됐다. 유신의 주도 지역은 조슈 번(長州, 지금 야마구치 현)이다. 러시아와의 전쟁 결행도 조슈의 작품이다. 그곳 출신이 주도했다. 주역은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다. 아베 총리의 지역구는 야마구치다. 그는 조슈의 후예다. 그의 역사관 뿌리는 조슈의 근대사 성취다. 그의 러일전쟁 언급은 짧다. 그것은 자부심의 압축이다.



 담화의 ‘아시아인 용기’는 쑨원(孫文)의 열광이다. 쑨원은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 민족이 최근 몇 백 년간 유럽인과의 전쟁에서 처음 거둔 것이다. 아시아인에게 하늘도 놀랄 기쁨(驚天喜)”이라고 했다. 중국은 유럽 열강의 약탈에 지쳤다. 쑨원은 중국인의 존경 대상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은 조선에 재앙이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독점했다. 을사늑약부터 망국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대국이었다. 신흥국 일본은 압승했다. 예상을 깬 결과다. 결정판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궤멸이다. 그것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쓰시마 해전 승리다. 그 배경에 영·일 동맹이 있었다. 유럽의 발틱함대(38척)가 동해로 가는 데 7개월이 걸렸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했다. 영국은 자국 식민지 기항을 거부했다. 석탄 공급 요청을 외면했다. 발틱함대는 기력을 잃었다.



 영·일 동맹은 러시아 남하의 공동 억제다. 러시아의 야심은 영국을 자극했다. 영국은 중국(청나라)에서의 이권을 지키려 했다. 1902년 1월 런던에서 동맹이 맺어졌다. 조약 핵심은 “영국의 권익이 중국과 연관돼 있다. 일본은 중국에서의 권익과 더불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이익을 갖고 있다.”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Lansdowne)은 불만스러웠다. 그는 “동맹의 이득이 일본에 더 많다”고 했다. 하지만 조약 내용은 유지됐다. 일본의 결의는 선명했다. “일본이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겠다. 대신 영국은 우리를 지원해 달라”는 식이다. 그 다짐은 영국을 설득했다. 영국 외교는 동맹의 파격을 선택한다. 그것은 일본 외교의 쾌거다.



 아베 총리는 “역사 교훈을 통해 미래를 향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러일전쟁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베 외교의 전략적 상상력을 공급한다. 그 시절 영국은 세계 최강이다. 그런 제휴는 미래를 기약한다. 외교는 전쟁 승리를 보장한다. 지금의 동북아는 갈등과 전환이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은 눈부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동북아 정책은 아시아 재균형이다. 미국의 중국 포위망은 조밀해지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을 포기했다. 그것은 혼자 러시아를 꺾기 힘들어서다. 21세기 미국의 힘은 떨어졌다. 단독으로 중국 기세를 막기 어렵다. 일본은 그런 형편의 미국을 뒷받침한다. 아베 외교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일본이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겠다. 그 대신 미국은 일본을 지원해 달라”는 식이다. 영·일 동맹은 롤 모델로 작동했다. 오바마와 아베는 단합했다. 미·일의 신(新)밀월 관계가 펼쳐진다.



 중국은 아베 담화를 비난했다. 미국 백악관은 환영 입장을 표시했다. 오바마 정부는 아베의 집단 자위권을 밀어준다. 한 세기 전 동북아 구도는 대륙(러시아)과 해양(영·일)세력의 충돌이다. 현재의 판세도 대륙(중국)과 해양(미·일)의 대치다.



 한·미·일 삼각 공조는 허술해졌다. 그것은 시진핑(習近平) 외교의 성과다. 중국은 한국과 과거사 공동 전선을 펼쳤다. 한국은 일본을 압박했다. 박근혜 정권의 친중·반일 공세가 강화됐다.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이미지가 형성됐다. 그것은 백악관을 곤혹스럽게 했다. 아베 정권은 상황을 역이용한다. 아베 외교의 반격 노림수는 미·일 동맹의 지위 강화다. 그것은 한·미 동맹에 미묘한 파장을 던진다.



 박근혜 외교의 우선 목표는 한반도 질서의 관리다. 그 기반은 한·미 동맹이다. 동맹이 허술하면 풍광은 변한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관점은 바뀔 것이다. 그 시선에 얕보임이 드러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야심은 진행형이다. 동맹은 한반도 외교의 숙명이며 기량이다. 113년 전 영·일 동맹의 협상 주역은 주영 공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였다. 그의 회고록(A.M. Pooley 엮음, 신복룡·나홍주 번역)은 일본 외교의 화려한 기억이다. 주목할 구절이 있다. “우호적 열강으로부터 받는 신의를 유지하는 것이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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