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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64> 문경새재길 달빛 걷기

중앙일보 2015.08.20 00:01 Week& 4면 지면보기
문경새재길에 밤이 내렸다. 제1관문 주변이 길도 가장 넓고 안전해 밤에 걷기에도 좋다. 문경새재길에는 야간 조명이 아예 없다. 사진은 조명을 동원해 촬영했다.



‘좋은 소식 듣는 길’ … 호남 선비도 일부러 들러 과거 보러 갔죠

도시에서 휘영청 밝은 달을 보는 일은 여간해서 힘들다. 밤늦도록 밝힌 조명에 달빛이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달과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만끽하려면 인공 빛이 전혀 없는 암흑의 세상을 찾아서 가야 한다. 달빛 아래에서 걸으려면 사실 날짜가 중요하다. 날짜 중에서도 음력이 중요하다. 음력 보름을 끼고 앞뒤로 하루 이틀이 달빛 받아가며 걸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그러나 week&은 음력으로 6월 22일, 양력으로 8월 6일 저녁 문경새재를 걸어서 넘었다. 음력 보름 즈음에 새재에서 ‘달빛 사랑 여행’이라는 이름의 야간 걷기 행사가 진행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해설사와 함께 달빛 사랑 여행 코스를 따라 새재를 걸었다. 달이 없었어도 나쁘지 않았다. 달이 없는 대신 별이 많았다.





고개에 얹힌 꿈



문경새재길 초입에 있는 옛길박물관. 길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넘은 건 고개고, 걸은 건 길이다. 새재를 넘었더니 문경새재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경북 문경의 문경새재도립공원에서 시작해 새재를 넘어 충북 괴산 고사리마을에서 끝나 트레일의 이름이 문경새재길(8.9㎞)이다. ‘새재 넘어 소조령길’ 1코스에 해당한다. 새재 넘어 소조령길은 모두 4개 코스가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 문경새재길이다. 당연하다. 천 년의 역사가 밴 백두대간의 고개 새재 덕분에 문경과 충북 충주와 괴산을 연결하는 트레일이 조성됐다.



문경새재길을 맨발로 걷고나서 시원한 물에 발을 씻고 있는 탐방객들.




문경새재길에는 별명도 많다. 과거길·금의환향길·낙방길 등 옛 과거시험과 관련한 것인데, 연유는 이렇다. 옛날 영남과 한양을 이어주던 고개가 세 개 있었다. 죽령과 추풍령, 그리고 문경새재인데, 이 중에서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가장 좋아했단다.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고 해서 피했고, 추풍령은 ‘가을 낙엽 떨어지듯이 떨어진다’해서 꺼렸단다. 문경(聞慶)은 ‘듣다 문’에 ‘경사 경’을 쓴다. ‘좋은 소식을 듣는 곳이다’고 하여 이 길을 선호했단다. 영남 지역은 물론이고 호남 지역의 선비도 일부러 길을 둘러와서 문경새재를 넘었을 정도였다. 이춘자(55) 문경새재 문화해설사가 자랑스레 말했다.



“문경은 살아있는 ‘길 박물관’이에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 ‘하늘재(명승 제49호)’, 신라시대 때 열렸다고 알려져 있죠. 태조 왕건과 관련한 전설을 품고 있는 ‘토끼비리(명승 제31호)’, 조선의 대표 고갯길인 ‘문경새재(명승 제32호)’까지 옛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과거를 보러 떠나는 길도, 합격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도, 낙방해서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던 길도 모두 문경새재길이었다. 길이 비교적 널찍하고 치안이 잘 돼 있어 선비가 이 길을 걸었고, 평민이나 상인은 좀 더 험한 토끼비리나 하늘재를 이용했단다.



새재의 한자어는 조령(鳥嶺)이다. ‘산세가 워낙 험준해 새도 쉬어간다’고 해서 새재라고 했고, 그 뜻을 한자로 바꿔 조령이라 불렀다. 새재는 양옆으로 조령산(1025m)과 주흘산(1079m)을 끼고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험준한 산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고개 역시 해발 672m에 이른다.



계곡 위로 설치된 조곡교를 건너면 제2관문이다. 제2관문은 3개 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새재에는 관문이 모두 3개가 있다. 1594년에 제2관문, 1708년에 제1관문과 제3관문이 세워졌다. 제1·2관문은 왜구를, 3관문은 오랑캐를 막으려고 쌓았다고 한다. 새재가 한반도의 주요 통행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이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 왔다.



경상감사가 인계인수를 했던 곳으로 알려진 교귀정.




이춘자 해설사는 1∼2∼3관문을 차례로 지나 새재를 넘은 뒤 다시 1관문으로 돌아와 야간 산책하는 일정을 권했다. 문경새재길에는 조명이 전혀 없다. 해서 야간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주로 1관문을 추천한다. 길이 널찍하고 직선로이어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 1관문 주변이 시야가 트여 있어 달과 별을 보기에도 좋다. 달빛 사랑 여행도 오후 4시부터 8시30분까지 도립공원 들머리에 있는 야외공연장에서 시작해 교귀정까지 왕복 6㎞를 걸으며 체험 행사를 진행한 다음, 해가 지고 난 다음에는 자유롭게 1관문 주변을 산책하는 일정으로 짜여 있다.





별빛 걷기



“이쪽으로 와서 기도하고 걸어요.”



이춘자 해설사가 1관문을 통과하고는 성곽 귀퉁이에 있는 후미진 곳으로 안내했다. 성벽 오른쪽 끝에 성황사가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수령 400년이 훨씬 넘은 회나무 두 그루를 이은 줄에 소원을 적은 오색빛깔 천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문경새재의 성황사는 조선시대 정치가 최명길(1586~1647)과 관련이 있다. 최명길이 젊은 시절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에서 청주로 가던 중에 젊은 여인으로 변신한 산신령을 만났다. 새재를 같이 넘은 여신(女神)은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인데, 청나라와 손을 잡아 나라를 지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후에 여인의 말대로 병자호란(1636~1637)이 터졌고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문경새재길은 황토가 깔려있어 맨발로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성황사에서 내려와서는 신발을 벗었다. 마사토가 깔린 황톳길이 제3관문까지 이어져 맨발로도 걸을 수 있었다. 새롭게 황토를 깐 구간을 만나면 아이처럼 종종걸음을 걸었다. 수분을 머금어 적당히 폭신한 느낌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문경새재는 옛날 양반이 주로 걸었던 길이다. 길 주변으로 옛 흔적을 뒷받침하는 흔적이 남아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령원터와 교귀정이다. 조령원은 양반이 이용하던 여관으로, 한때는 순찰대도 배치됐었다고 한다. 교귀정은 경상감사가 인계인수를 했던 곳이다. 계곡과 마주보는 구릉에 세워진 정자로 문경새재길 중에서 가장 경치가 좋단다. 수풀에 가려 계곡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만은 우렁차게 들렸다.



보통 제2관문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서 오는 사람이 많은데, 문경새재길의 진가는 2관문부터 나타난다. 숲이 더 깊어졌고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사람의 말소리는 사라지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종아리 근육이 단단해질 정도로 적당히 경사가 있어 제법 운동하는 기분도 들었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도 마음이 상쾌했다. 제2관문까지 직선로가 많았다면, 3관문까지는 꼬부랑길이 대부분이었다.



퇴약볕 내리쬐는 한여름이었지만, 숲에 들어오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녹음이 우거져 직사광선이 들 틈이 없었다.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자외선차단제가 민망할 정도였다. 제3관문을 지나고부터는 충북 괴산 땅이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통과해 고사리마을에 도착하자 문경새재길이 끝났다.



다시 1관문으로 돌아왔다. 오후 7시부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8시가 되자 완전히 깜깜해졌다. 산중에는 어둠이 훨씬 일찍 깔렸다. 드디어 문경새재의 밤이 시작됐다. 제1관문 주변을 산책했다. 삼삼오오 모인 관광객이 손에 작은 전등을 들고 조심조심 밤길을 걸었다. 달은 볼 수 없었다. 그 자리를 별이 대신했다.



웅장한 성곽 위로 펼쳐진 너른 하늘에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눈은 금세 어둠에 적응했다. 기분 좋은 정적에 휩싸였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성벽에 꽂힌 깃발뿐이었다. 한 방향으로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을 통과하는 바람이 눈에 잡히는 듯했다.









●길 정보=문경새재길은 고개를 넘는 길이다. 순환코스가 아니어서 끝까지 길을 걸으면 출발점으로 이동하는데 애를 먹는다. 보통 문경새재도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걷는다. 주차비 승용차 기준 2000원. 1코스 종착점인 충북 괴산 고사리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돌아온다. 약 30분이 걸리고 택시비는 3만5000원 선이다. 도(道)를 넘나들기 때문에 택시비가 비싸다. 문경새재콜택시 054-552-9985. 제1관문부터 제3관문까지 약 6.5㎞ 구간에는 조명이 전혀 없다. 밤에 걸으려면 손전등이 꼭 필요하다. 대여섯 명이 모여 걷는 것이 안전하다. 문경문화원(mgmtour.co.kr)이 매년 ‘문경새재 달빛 사랑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공연장에서 시작해 교귀정까지 왕복 약 6㎞를 걸으며 민속놀이, 삼행시 과거시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한다. 참가비 어른 1만2000원, 초·중·고등학생 1만원. 1년에 5번 음력 보름 전후 토요일 저녁에 진행한다. 오는 29일, 다음달 12일, 10월 24일에 일정이 잡혀있다. 054-555-2571, 문경새재도립공원(saejae.gbmg.go.kr) 054-571-0709.





글=홍지연 기자 jhong@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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