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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향수, 후각을 읽는 자유

중앙일보 2015.08.18 00:17 종합 32면 지면보기
전수경
화가
가당찮은 시도였다. 지난봄 홍콩에 출장 간 친구가 카톡을 보내왔다. 선물을 사러 향수 매장에 들렀다며 엉뚱하게 사진을 보고 고르라 했다. 시향(試香)은 엄두조차 못 내고 나와 친구는 후각 정보를 말과 이미지로 바꾸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나의 사진까지 매장 직원에게 보여주며 내게 맞을 법한 향으로 좁혀 갔다. 그 향수가 지금 내 책꽂이 선반에 놓여 있다. 이제 새 향수에 적응하는 일이 남았다.



 향에 대한 즐거움은 사람마다 다르다. 좋은 냄새의 꽃 한 다발은 타인과 나누어 즐길 수 있지만 그 꽃에서 추출한 향수의 취향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 더해 향수는 분사를 통해 피부의 체액과 섞여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의 향으로 발화한다. 따라서 상대의 정확한 기호(嗜好)를 모른 채 향수를 선물하는 것은 무모하다. 향수 선물은 특정의 취향을 선물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화가로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역시 시각 정보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80%는 시각에 의존한다. 그다음이 청각-촉각-미각 순이다. 후각은 맨 끝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후각이 약화됐다고 해도 그 중요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07년의 유명한 실험이 ‘네이처’에 실린 미국 듀크대와 록펠러대의 ‘오빠 셔츠 냄새’ 연구다. 여성 400명에게 땀에 젖은 셔츠의 냄새를 맡게 했더니 친오빠의 냄새에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다. 우리 DNA에는 후각을 통해 근친상간을 억제하는 정보가 남아 있는 셈이다. 최근 다른 연구에서도 호감 가는 이성에 대한 냄새가 그의 외모나 성격보다 훨씬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을 제공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술에서도 향기는 사소한 요소가 아니다. 사물이 지닌 본질의 색을 층지게 표현한 세잔, 캔버스를 소용돌이치는 붓 자국들의 원색으로 가득 채운 고흐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를 만나게 된다. 청량한 기후와 짙은 향을 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곳. 세잔이 머문 엑상프로방스와 고흐가 사랑한 아를이 있는 지역이다. 이 두 화가는 그 대기 속의 냄새를 시각화하면서 미술을 살찌웠고, 독일 시인 릴케도 “프로방스 여행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당신도 꼭 한번 가보시길…”이라는 편지를 친구에게 띄웠다.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프로방스를 무대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7세기에 향수 산업을 주도했던 그라스(Grasse)가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가죽옷을 즐겨 입었지만 썩어가는 악취가 문제였다. 그라스는 가죽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맨 처음 향수에 눈을 돌린 곳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라스는 전 세계 향수의 메카로 군림하고 있다.



 요즘 미술계도 향기를 재발견하고 있다. 전시회마다 조명뿐 아니라 음악, 향기까지 신경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관람객이 보다 작품 감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대표적 전시회가 지난봄 베이징의 ‘미스 디올(Miss Dior)’ 전이다. 여성의 향기를 미술로 표현한 이 전시회에서 한국 작가 이불은 자신의 작품에 “향은 사라지지만 기억으로 남는다. 기억이란 바로 자아 성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그렇다. 필자 또한 산책 길에서 마주친 소나무의 꺾인 가지에서 미술대학의 실기실을 떠올린다. 소나무의 송진이 유화의 용재인 터펜타인(turpentine)의 냄새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기는 짧은 순간에 무한한 우주의 환상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알퐁스 도데의 ‘별’의 주인공인 목동이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향기를 맡으며 그 영혼이 끝 모를 깊이의 밤하늘로 향했던 것처럼….



 장마와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필자의 작업실이 있는 정릉 언덕이 청명하다. 주택가 곳곳의 능소화 향기가 화실 창을 타고 넘어온다. 향기는 나를 자유롭게 하고 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상큼한 때를 일깨운다. 친구가 선물해준 그 향수도 모처럼 손목에 뿌려본다. 화실 가득 장미 꽃잎으로 나부끼는 화면에 한 소녀가 누운 느낌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를 살짝 빌려오면 향수 한 방울로 ‘코리안 뷰티’가 된 기분이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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