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년 도시에서 새로운 천년의 영감을 얻다

중앙선데이 2015.08.15 03:19 440호 8면 지면보기
“영감을 어디서 받습니까?”
창작자들을 만나면 가장 궁금하고, 그래서 꼭 하게 되는 질문이다. 이를 패션 하우스 발렌티노의 듀오 디자이너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피엘 파올로 피촐리에게 묻는다면? 답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로마’다. 1960년 첫 매장을 연 이래 브랜드의 아틀리에가 지금까지도 둥지를 틀고 있는 그 도시다. “로마는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는 곳이죠. 아름답지만 서로 상반되고, 또 다면적인 도시예요. 로마제국부터 네오 리얼리즘까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잠재력을 지녔죠.”

발렌티노가 표현한 로마라는 의상

두 사람은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난달 8~11일 나흘간 특별한 행사를 벌였다. 영감을 얻었던 숨겨진 로마 유적지 10곳을 소개하고, 각 장소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과거 의상들을 함께 선보인 것. 발렌티노 로마 플래그십 매장 오픈을 기념하는 ‘미라빌리아 로마(Mirabilia Romae·경이로운 로마)’ 행사의 일환이었다.
스페인 계단에서 시작된 네 시간의 투어는 뻔한 관광도시로 여겨지던 로마의 재발견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에서 지내는 것이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했던 두 창작자의 예찬에도 동의하게 된다. 그 영감의 순례길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 카사나텐세 도서관
(BIBLIOTECA CASANATENSE)
입구부터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실제로 보면 더 압도적이다. 족히 길이 40m는 돼 보이는 중앙 열람실에는 분야별로 나뉜 고서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그득하다. 모두 6만 여권이다. 이 도서관은 지롤라모 카사나테 추기경(1620~1700)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녀원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 2만 권 이상을 기증하고 수녀원 건물을 개보수를 위해 거액의 기금을 남기면서 설립된 곳이라고 한다. 18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도서관답게 40만 권이 넘는 각종 고서는 물론 인쇄물, 회화, 과학도구까지 소장돼 있다.
그 엄숙한 열람실의 중앙 복도에 십 수벌의 의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는 도서관에서 영감을 얻어 ‘호기심의 옷장’이라는 타이틀로 제작된 2013 F/W 컬렉션이다.

성 아그네스를 위한 성당과 조화를 이룬 화이트 드레스. ●
● 성 아그네스를 위한 성당
(SACRISTY - SANT’AGNESE IN AGONE)
로마의 유적으로 가톨릭, 아니 성당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다음 목적지는 영화 ‘다빈치코드’의 무대 나보나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성 아그네스를 위한 성당’이다. 본래는 교황(피노센트 10세 팜필리)의 개인 예배당으로 설계됐지만 도미치아누스 경기장에서 숨을 거둔 어린 순교자 성 아그네스에게 헌정하는 장소가 됐다.
이 공간에서 발렌티노의 두 디자이너가 느낀 것은 분명 성스러움이었으리라. 성당 꼭대기에 오르면 아이보리색 가운 드레스를 입힌 마네킨이 바깥을 향해 서 있다. 극단적으로 장식과 실루엣을 배제시킨 사제복의 기운이 느껴진다(2013년 S/S 봄여름 오트 쿠튀르). 마네킨 주변으로 빙 둘러친 촛대 역시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 메디치 빌라
(GABINETTO DI FERDINANDO - VILLA MEDICI)
스파냐 역 근처, 이탈리아 문화 융성의 주역인 메디치 가문의 저택이 있다. 피렌체에 기반을 둔 가문은 로마에서도 그 재력을 뽐내며 별장을 지었다. 그리고 1803년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내주게 된다. 화가 발튀스(1908~2001) 역시 이곳에서 작업한 인물 중 하나다.
프랑스식 호사로운 정원을 한참 지나 다다르는 곳은 방 두 개짜리 아담한 건물(가비네토 디 페르디난도). 침대 하나가 겨우 놓일만한 ‘새의 방’에 들어서면 백과사전을 시각화한 듯 수많은 새와 동물들이 모여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쯤이면 방 한가운데 설치된 세 벌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꽃과 풀, 나무 무늬가 옷을 뒤덮고 있다. 꽃잎 하나하나를 장인의 섬세한 자수로 표현한 것도 백미다(2012 S/S·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 ● ● 프리마티초 갤러리& 피렌체 광장 (GALLERIA DEL PRIMATICCIO& PALAZZO FIRENZE)
로마에 ‘피렌체 광장’이 있다. 메디치 가문의 사유지다. 광장이라기보다는 좀 넓은 마당쯤 돼보이지만 막상 갤러리인 건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세상이다. 유리벽이 세워진 공간은 바깥 정원이 그대로 시야에 잡힌다. 안과 밖의 경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대칭 아닌 대칭이다.
전시된 의상 역시 그런 컨셉트다. 서로 등을 돌려 서 있는 두 마네킹. 각각 붉은색과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언뜻 색깔만 다른 옷처럼 보이지만 무늬나 실루엣이 엄연히 다르다. 바닥에는 거울을 깔아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그대로 반사된다. 이번엔 위와 아래의 혼재다.

오페라 창고에서는 1900년대 오페라 의상들과 오트 쿠튀르 드레스들을 함께 짝지었다. 오페라 음악이 울려퍼져 그 웅장함을 고조시켰다. ●
루이지 온타니의 작업실 내부. 의상이 전시돼 있진 않지만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 ●
● 오페라 창고 (DEPOSITI DEL TEATRO DELL’OPERA)
원형 대경기장과 팔라티노 언덕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은 그야말로 보물 창고다. 발레와 오페라 무대 의상만 6만 여벌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1900년 ‘토스카’의 초연에서 아리클레아 다르클레가 입었던 의상을 포함해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나비부인’ ‘라 트라비아타’ ‘오델로’의 주연배우 의상 역시 고스란히 남아있다(원래 건물이 파스타 창고였던 터라 의상들을 온도와 습도에 맞춰 보관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극적이고 과감하면서 섬세한 이 오페라 의상들은 발렌티노의 오트 쿠튀르와 결을 같이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둘을 섞어 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놀랍게도 통일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2014 S/S 오트 쿠튀르). 한편 건물의 지하에도 귀한 유물이 숨어 있다. 1세기 로마에 흡수된 고대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에게 헌정하는 작품들인데, 여기에 발렌티노는 브랜드의 시그너처나 다름없는 붉은 드레스들을 배치했다.

● ● 루이지 온타니의 작업실 (LUIGI ONTANI ATELIER)
안토니오 카노바(1757~1822)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의 작품 ‘에로스와 푸시케’ 역시 로마에서 탄생했다, 그러한 그의 작업실이 지금도 한적한 골목길에 남아 있다. 외관은 물론이고 높은 천장이 특징인 건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다. 흥미롭게도 공간의 정체성 역시 그대로다. 이탈리아의 동시대 아티스트인 루이기 온타니의 작업실이 된 것. 그래서 유적지 10곳 중 유일하게 의상 전시가 안 돼있지만 영감의 유적지로 꼽은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의 연속성, 그 가치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존중이다. .

● 아카데미아 무수메치 그레코 (ACCADEMIA MUSUMECI GRECO)
로마에 ‘펜싱의 신전’이 있다. 아카데미아 무수메치 그레코다. 르네상스 시대 그레코 가문이 만들어 지금껏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자를 배출하며 최고의 펜싱 학교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교실에 들어가니 펜싱과 관련된 다양한 회화 작품, 과거의 펜싱 도구가 사방에 걸려있다. 그 가운데 단 한 벌의 옷, 그리고 펜싱 칼이 철제 구조물 속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드레스는 여인의 옷이 아닌 무인의 의상 같다. 로마 군복을 모티브로, 또 ‘보호’의 의미가 강한 실버가 메인 컬러다(2014 S/S 레디투웨어). 전시와 함께 진행된 짤막한 펜싱 퍼포먼스가 이를 극대화시킨다.

● ● 도리아 팜필리 궁전 (BAGNO DI DIANA - PALAZZO DORIA PAMPHIL)
이제 17세기 이후 도리아 란디 팜필리 가문이 소유했다는 궁전으로 들어선다. 규모 면에서는 유럽의 웬만한 왕궁보다 크고, 희귀한 회화 및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건물 1층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개인 아파트와 연결된 계단이, 왼편으로는 작고 아담한 문이 보인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상상 이상의 장면과 마주한다. 한가운데 둥글고 널찍한 대리석 욕조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2014 F/W 오트 쿠튀르를 입은 마네킹들이 우아하게 눕거나 서 있다. ‘바뇨 디 디아나(디아나의 욕실)’라고 불리는 곳으로, 욕조도 욕조지만 폼페이 양식의 고전적 인테리어까지 빛난다.
이 특별한 욕실에는 사연이 있다. 1840년 필리포 안드레아 5세는 아내 매리 탈봇을 위해 공사를 의뢰했고, 당대 최고의 장식 예술가들은 온 힘을 쏟았다. 욕조는 19세기 중반 로마에서 가장 유행했던 인테리어를 보여준다. 욕실은 전체적으로 폼페이 양식의 건축적, 형식적 형상을 갖췄다. 로마의 궁전과 빌라에서도 이런 욕조가 있는 곳은 흔치 않은데, 도리아 팜필리 가문의 손님들은 지금도 이 욕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 ● ● 페치 블런트 궁전 (PALAZZO PECCI BLUNT)
미켈란젤로 계단 앞 델 아라코엘리 광장이 내다보이는 이 궁전은 16~17세기 추기경들의 보금자리요, 귀족과 교황청 관계자들이 자주 찾는 정치적 성지였다. 하지만 20세기 초 소유주 가문의 안나 라에티티아 페치 블룬트 백작부인이 물줄기를 바꾼다. 그는 20세기 초 파시즘으로 20여 년 동안 고통받았던 예술가들을 데려와 이곳에서 전시를 연다. 또 스트라빈스키발레리 등 저명한 예술가를 초청해 연주회나 문학 감상회를 마련하고,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작은 라 코메타 극장과 함께 이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궁전의 우아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혁신과 창조였다.
이는 발렌티노의 두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전임자이자 전설의 디자이너인 발렌티노의 유산을 한 단계 뛰어넘는 작업을 해야만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시는 이와 맞닿아 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빨강-흰색-검정으로 대표되는 브랜드 정체성을 어떻게 변주시켰는지, 아카이브에 숨어 있던 카무플라주를 어떤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는지를 방대한 과거 컬렉션을 통해 선보인다.

● ● ● ● 키리코 재단 (FONDAZIONE DE CHIRICO)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고, 스페인 광장은 로마의 중심이기 때문에 나와 아내는 세계의 중심에서 살아야 한다.” 현대 이탈리아 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 초현실주의의 개척자인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가 회고록에 남긴 말이다.
스페인 광장 31번지에 위치한 이 아파트에서 키리코는 두 번째 아내 이사벨라 팍스츠베르와 30년을 함께 살았다. 1948년, 이미 예순의 나이로 뉴욕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긴 세월을 보낸 뒤였다. 오늘날 그의 재단은 키리코의 작업실을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상태로 보존하여 그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여기에 전시를 위해 작업실 한 켠, 그의 팔레트 물감을 그대로 흩뿌려놓은 듯한 드레스 한 벌을 함께 배치했다(2014-15 S/S 오트 쿠튀르) ●



로마를 위한, 로마에 의한 쇼
지난달 9일 스페인 계단 옆 미냐넬리 광장에서는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 쇼가 열렸다. 행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특별했다. 매 시즌 쇼가 열리는 파리 대신 로마를 택한 것, 그리고 여름 휴가 관광객으로도 거리가 터져 나갈듯한 이곳에 런웨이가 마련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쇼는 발렌티노가 로마라는 도시에 천착했고, 또 로마시가 이를 전폭 지지했다는 증명이었다. 디자이너 키우리와 피촐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도시로서의 로마를 옷으로 풀어냈다. 즉, 이교도와 기독교, 관능과 엄숙함, 어둠과 유혹이 공존하는 디자인으로 컬렉션을 전개했다. 고전적인 드레이핑과 사제복 같은 실루엣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대 로마 시민들이 입던 토가와 케이프를 응용한 의상들이 이어져 나왔다. 특히 롱드레스들은 근위대의 엄격함을 내재한 코트와 케이프로 눈길을 끌었다. 또 석류와 밀처럼 로마의 상징적 아이콘을 녹여내는가 하면 대리석 질감의 패턴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의상 컨셉트에 맞춰 무대 세트 역시 로마 포로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꾸몄다. 이탈리아 컨템포러리 아티스트 피에트로 루포가 작업을 맡았다.


로마(이탈리아)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발렌티노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