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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바꾼 지식인의 책임

중앙선데이 2015.08.16 00:26 440호 30면 지면보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
1910년 7월 25일(음력),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합병했다. 지리산 자락 구례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망국의 소식을 접한 것은 8월3일. 이틀 뒤 자살을 결행했다. 매천은 아편을 술에 타서 마셨다. 약 기운이 퍼져 숨을 거두기까지 만 하루가 걸렸다.

[古文산책] 梅泉 황현의 순국

아편을 마시기 앞서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겼다. 그는 시에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者人)”고 썼다. 또 유서에서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한지가 500년이 되었는데, 망국을 당하여 죽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며 자결의 뜻을 밝혔다.
동생 황원은 옆에서 형의 죽음을 지켜봤다. 황원이 시문의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매천은 “창강에게 물어야 할 텐데, 멀어서 어떻게 하지”라고 답했다. 창강 김택영(1850~1927)은 중국 망명 중이었다. 상해 인근 남통에서 매천의 순국을 전해 들은 김택영은 친구를 회억하며 『황현의 전기(黃玹傳)』를 썼다. 또 매천의 유묵을 넘겨받아 자신이 일하던 ‘한묵림서국’에서 『매천집』을 간행했다. 창강은 매천의 전기를 쓰고, 문집을 펴내면서 친구의 죽음을 주목했다.

채용신이 그린 황현의 초상화(1911).
매천은 왜 자결을 택해야 했을까. 한말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국난 대처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일(擧義掃淸), 둘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옛 정신을 지키는 일(去之守舊), 셋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것(自靖遂志)이다. 유인석이 사용한 방법은 의병과 망명 투쟁이었다. 김택영은 해외 망명을 택했다.
매천 앞에도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는 의병투쟁을 긍정하지 않았다. 승산이 적고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을 때 완곡히 거절하였다. 망명 기회도 있었다. 김택영이 함께 중국에 망명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은 아니라는 생각에 동행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매천의 죽음은 예비된 것이었다. 그는 친구 이건창이 타계하자 통곡하며 조문하는 시를 지었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절했을 때도 그랬다. 민영환·조병식·홍만식 등 을사늑약 때 순국한 우국지사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시를 지어 애도했다. 『매천집』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가 50여 편이나 실려 있다. 남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여겼다. 『매천집』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만약 한 몸을 헛되이 버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경중과 이해를 따지고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헛되이 죽지 않으려 한다면, 꼭 죽어야 할 상황이 되어도 죽지 못할 것이다.”
매천은 한일합병이야말로 ‘꼭 죽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동시대 우국지사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조문한 그에게 죽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어머니 노씨가 항상 황원에게 “국난에 죽을 사람은 반드시 네 형일 것이다”는 말을 했을까.
매천의 순국은 우연이나 한때의 의분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건이었다. 그의 자결은 군주나 나라에 충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벼슬도 하지 않은 시골 선비가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는 다만 ‘글 아는 사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와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조운찬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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