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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9>"일본놈만 때려잡으면 뭐든지"…항일에 모여든 청년들

중앙일보 2015.08.15 15:08



융통성 없는 파출소장 덩터메이
경찰 쫓겨나 방랑하다 항일 결심
펑청에서 청년 모아 유격전 개시
결국 밀고로 붙잡혀 살해 당해

1993년 봄, 중국은 민정법(民政法)을 개정했다. 도로나 마을 명칭에 인명 사용을 금지 시켰다. 랴오닝(遼寧)성 펑청(鳳城)도 시 중심을 관통하는 덩테메이(鄧鐵梅·등철매)로와 먀오커슈(苗可秀·묘가수)가의 개명을 서둘렀다.



우선 각계에 의견을 구했다. 원래대로 유지하자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게 역사 교육이다. 거리를 오가며 두 사람의 이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청소년들에게 교육적 의미가 크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 정부는 민의가 우선이라며 법규를 무시했다. “항일 영웅의 이름을 딴 지명은 불변이다.”



덩테메이는 원래 경찰이었다. 사람이 좋고 솔직했다. 융통성은 없었다. 뇌물 밝히는 상관들이 적당히 처리하라는 사건일수록 물고 늘어졌다. 엄청난 결점이었다. 파출소장을 끝으로 경찰에서 쫓겨났다. 윗사람들에게는 미운 털이 박혔지만, 부하나 골목 아줌마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펑청을 떠나는 날 훌쩍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덩테메이는 선양(瀋陽)을 떠돌고 있었다. 군인들은 정부의 부저항 정책에 충실했다. 펑청을 수비하던 군인들도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도시와 무기들을 통째로 일본군에게 내줬다.



덩테메이는 정부의 무능에 가슴을 쳤다. “온갖 잘난 척하며 거드름 피우더니, 저런 것들이었구나.” 진저우(錦州)에 주둔하던 옛 상관 황셴성(黃顯聲·황현성)을 찾아갔다. “일본에게 무력으로 저항하고 싶다. 방법을 말해달라.”



경찰들을 동원해 일본군과 혈전을 치뤘던 황셴성은 고지식했던 옛 부하를 격려했다. 건의도 잊지 않았다. “장소가 중요하다. 랴오둥(遼東) 삼각지는 지형이 복잡하고 인근에 의지할 만한 마을들이 많다. 의용군이 활동하기에 적합하다. 너는 펑청에 오래 근무했다. 그곳 사람과 지형에 익숙하다. 네가 나서면 따를 사람들이 많다. 일본을 철전지 원수로 여기는 조선인들도 많은 지역이다. 일단 거기서 시작해라.” 덩테메이의 눈이 반짝했다. 황셴성은 충고도 곁들였다. “단점도 많은 지역이다. 봉쇄 당하면 빠져 나갈 곳이 없다.”



펑청에 잠입한 덩테메이는 친구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했다. 다들 “네가 나선다면 따르겠다”며 동의했다. 조선 청년들은 더했다. “일본 놈만 때려 잡을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



10월 하순, 현재 덩테메이로의 한 가운데에 있던 커다란 집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무장을 하고 나타난 덩테메이가 동북민주자위군(東北民主自衛軍) 성립을 선포했다. 참석자들은 덩테메이를 사령관에 추대했다. 종지(宗旨)도 통과시켰다. “무장으로 일본에 대항(武裝抗日)하고, 고향을 보위한다(保衛家鄕)”. 소문이 퍼지자 요동의 전직 경찰관과 청소년들이 펑청으로 몰려들었다. 1500명이 되자 부대를 편성했다. 전투부대 외에 정찰대를 따로 두고, 창과 검술에 능한 청년들로 무술부대도 만들었다.



덩테메이가 지휘하는 자위군의 첫 번째 전투는 무술부대가 선봉에 섰다. 12월 26일 야밤에 유서 깊은 펑황(鳳凰) 성(城)을 기습했다.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탄약을 확보했다. 감옥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9월 18일 이후에 수감된 사람들을 풀어줬다. 약방으로 위장한 일본 특무기관은 폭탄으로 날려버렸다.



덩테메이는 본인만 몰랐을 뿐, 타고난 유격전의 귀재였다. 전 대원들에게 엄수할 사항을 주지시켰다. “항일 구국은 민중 보호가 제일 중요하다. 지혜와 용기, 인지함과 신의를 존중하지 않는 무장세력은 비적과 다를 게 없다. 주민을 불안하게 하거나 부녀자를 희롱하는 자는 적으로 취급한다.”



“돈을 멀리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군민일체, 항일구국, 실지회복”등 투쟁 구호도 직접 만들었다. 지휘관들에겐 더 엄격했다. “부하들을 모욕주거나 때리지 않는다.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자위군은 도처에서 일본군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시간이 갈수록 인원이 불어났다.



덩테메이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늦게야 깨달았다. 만 명이 넘자 무기와 양식이 부족했다. 일본 관동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토벌에 나섰다. 1933년 한 해에만 자위군 87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덩테메이는 병력을 분산시켰다.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거의 매일 일본군과 싸웠다.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산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본은 덩테메이 암살단을 조직했다. 효과가 없자 매수에 나섰다. 덩테메이의 경호원이 걸려들었다.



1934년 5월 초, 이질로 고생하던 덩테메이는 더 이상 행군이 불가능했다. 부하들이 권했다. “일본군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서 치료에 전념해라.” 덩테메이는 한 마디로 거부했다. “빼앗긴 땅을 되찾는 날 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5월 30일 덩테메이는 친척집에 머물고 있었다. 경호원의 안내를 받은 밀정들이 들이닥쳤다. 선양으로 압송된 덩테메이는 식음을 전폐했다. 관동군 보안국은 회유에 나섰다. “꼴 좋다. 네 부하가 너를 팔았다. 그런 것들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거냐. 우리에게 협조해라.” 덩테메이는 담담했다. “어느 조직이건 그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부대원은 만 명이 넘었다. 배신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싸잡아 모욕하지 마라.” 일본군 장교가 휘호를 청하자 선뜻 붓을 들었다. “5척에 불과한 몸, 아쉬울 게 없다. 동북 4성은 언제나 수복될까(五尺身軀何足惜, 四省之地幾時收).”



9월 28일 밤, 일본군은 비밀리에 덩테메이를 살해했다. 젊은 대학생 먀오커슈가 덩테메이의 유지를 계승하겠다고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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