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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군국주의 절망적 초상화 … 인간 어뢰 ‘가이텐’은 역전의 기적 이룰 수 없었다

중앙일보 2015.08.15 00:49 종합 16면 지면보기
‘인간 어뢰’ 가이텐 모형. 오쓰시마(大津島)의 가이텐 기념관 전시. 날개 4개와 이중 스크루의 최대 속도는 30노트. 앞쪽에 탄약 적재(1.55t). 항공모함을 폭침시킬 파괴력을 갖고 있다. [박보균 대기자]


가이텐 기지의 기념석(魚雷發射場跡, 어뢰발사장적)과 옆에 박보균 대기자.
1944년의 태평양전쟁은 처절했다. 그해 7월 사이판 옥쇄(玉碎)가 있었다. 일본군의 집단적인 자살 돌격. 구슬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일본군은 특공의 최후 수단을 동원했다. 바다 밑에 ‘인간 어뢰’ 회천(回天·가이텐) 이 등장했다. 하늘에는 가미카제(神風)가 누볐다.

전쟁의 광기
제해권·제공권 모두 빼앗긴 일본
바다엔 가이텐, 하늘엔 가미카제
미군에 맞선 야만적 특공 무기



 19세기 후반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의 가이텐은 세상을 바꿨다.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종식과 메이지 유신이다. 신사쿠의 역전 신화는 변질됐다. 제국 일본의 깃발은 광기로 가득했다. 신사쿠의 기적은 재현되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은 패망했다.



나 는 그 절망의 드라마를 찾아 나섰다. 야마구치(山口)현 슈난(周南)시의 오쓰시마(大津島)-. 가이텐 훈련 및 출격기지가 남아 있다. 나는 6월 말에 그 섬으로 갔다.



 규슈 하카다역에서 JR 신칸센을 탔다. 이번에도 우치다 고스케(內田·57·야마구치현 유신 100년 준비회 간부)씨가 동행했다. 1시간여 뒤 도쿠야마역에서 내렸다. 10분쯤 걸으니 항구다. 여객선 안내판은 만화 ‘特攻の島’(특공의 섬) 표지로 장식됐다. 안내판 글귀가 눈에 띈다. “오쓰시마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일본식 표현)의 열사(烈士)의 섬이다”-. 그 표현은 70여년 전으로 나를 이끈다.



 여객선은 세토(瀨戶) 내해로 들어간다. 바다는 잔잔했다. 배는 20분 후 부두에 닿았다. 조그만 선착장에 ‘오쓰시마, 가이텐의 섬 (回天の島), 어서 오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나는 가이텐 기념관으로 먼저 갔다. 20분쯤 언덕길을 걸었다. 단층 기념관 앞에 검은색 물체가 버티고 있다. 실물 모형의 가이텐. 설명은 간결하다. “원래는 어뢰였다. 잠망경이 달려 잠수정이 됐다. 무인 어뢰를 개조한 유인(有人) 어뢰정이다.” 가이텐은 우람하면서 날렵하다. 폭탄이 실리는 앞쪽은 위압적이다.



 기념관 안의 첫 안내 글은 결의에 차 있다. ‘天を回らし,戰局を逆轉させる’(하늘을 뒤집어 전쟁 국면을 역전시켜라) -. 가이텐 탄생은 젊은 장교들이 주도했다. “1943년 여름 해군 장교 구로키 히로시(黑木博司) 대위와 니시나 세키오(仁科關夫) 중위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필사필살(必死必殺)의 무기를 만들자고 했다.” 지금처럼 순항 미사일, 인공지능무기 시대가 아니다. 그때 일본 연합함대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절박한 상황은 극단의 발상을 끌어낸다. 우치다씨가 설명문을 정리한다. “사람이 조종, 유도하는 어뢰로 미군 함정 격침 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자는 목적이다.”



 두 장교는 그 구상을 대본영(大本營)의 해군 군령부에 건의한다. 수뇌부는 처음엔 난색을 표시했다. 하지만 특공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44년 8월 가이텐은 특공병기로 채택된다. 승무원 탈출 장비의 조건이 달렸다. 하지만 패전까지 그 장치는 설치되지 못했다. 가이텐은 죽음을 탑재한다.



① 인간 어뢰 가이텐 출정과 결별. 잠수함 갑판에 실린 가이텐 위에서 탑승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중앙포토], [박보균 대기자]


 1944년 9월 오쓰시마에 시험 발사장이 만들어졌다. 특수병기 명칭은 창안자 구로키 대위의 건의를 채택했다. 구로키는 ‘천하형세를 바꾸는 가이텐’을 외쳤다. 군령부는 ‘가이텐마루’(回天丸)라는 군함 이름도 참고했다. 부대원을 모집했다. 최초로 400명이 지원했다. 20대 전후다.(총 탑승원 1375명)





① 오쓰시마에 남아 있는 가이텐 훈련·발사장. ② 어뢰를 운반했던 터널. [박보균 대기자], [중앙포토]
전 시실에 몸통이 절개된 가이텐이 있다. 영화 ‘출구 없는 바다’(出口のない海, 개봉 2006년)의 촬영 세트다. 안내원은 “영화가 개봉된 해에 2만5000명이 여기에 왔다. 그 후 1년 평균 관람객은 1만5000명 수준”이라고 했다.



 우리는 해설문을 읽었다. 가이텐 모체는 ‘93식 산소 어뢰’(길이 14.75m. 몸통 직경 1m). 산소는 추진력을 높인다. 어뢰는 이렇게 개조됐다 ▶무게 8.3t ▶어뢰 안에 1인용 조종석과 잠망경 설치 ▶30노트 (시속 56㎞)로 속도 향상 ▶기폭장치 장약을 3배(1.55t)로 늘렸다. 나는 2006년 천안함 폭침과 비교했다. 북한 어뢰는 천안함(1220t)을 동강 냈다(북한 어뢰 무게 1.7t, 길이 7.35m, 장약 250㎏). 가이텐은 북한 어뢰를 압도한다. 가이텐의 파괴력은 전함·항공모함을 격침시킨다.



 가이텐 내부는 어지럽다. 10여 개의 복잡한 회로, 계기판. 1인 조종석은 웅크려 앉을 정도다. 아래 쪽 해치(hatch)로 모선(母船)인 잠수함과 연결된다. 가이텐의 행동반경은 좁다(30노트 때 23㎞). 태평양까지 혼자 갈 수 없다. 잠수함 갑판 위에 탑재된다. 잠수함은 미 기동함대를 찾아다녔다. 목표물을 발견한다. 이어서 잠수함 함장의 명령, ‘가이텐 발진’-. 탑승원은 잠망경으로 사각(射角)과 거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미군 함정 500~1000m 앞에서 돌진. 가이텐은 인간 어뢰가 된다. 출구 없는 바닷속 자살폭탄이다.



 나는 기념관을 나왔다. 바다 쪽 산비탈에 터널이 있다. 자동 방송 센서가 작동한다. “터널은 어뢰를 바닷가 기지로 운반하는 통로다.” 바닥에 광차(鑛車)형 레일 흔적이 남아 있다. 10분쯤 걸으니 터널 밖. 바닷가에 하얀 콘크리트 2층 건물이 보인다. 어뢰 발사장 겸 훈련기지. 원형 가까이 복원된 유일한 가이텐 기지다. 훈련 첫날 가이텐 창안자 구로키 대위가 숨졌다. 정비 불량 때문이다. 어뢰를 개조했기 때문에 조작과 운항, 정비가 어려웠다. 후진은 안 됐다.



② 자살공격에 나서는 가이텐 탑승원들이 미소짓고 있다. ‘七生報國’(칠생보국) 머리띠를 둘렀다. ③ 가이텐의 첫 전과. 1944년 11월 서태평양 캐롤라인제도에서 미 급유함(미시시네와)의 폭침 장면. ④ ‘回天の島’(가이텐의 섬), 오쓰시마(大津島) 선착장의 환영 현수막. [중앙포토], [박보균 대기자]


③ 가이텐 대원의 칼과 모자 등 소지품, 일장기에 學徒出陣(학도출진)이라고 써 있다. ④ 충성 혈서 ‘殉皇(순황)’. ⑤ 영화 ‘출구 없는 바다’(2006년 개막). 가이텐 대원의 고뇌와 자살공격의 허망함을 그렸다. [박보균 대기자], [중앙포토]
1944년 11월 8일 가이텐 작전이 시작됐다. 가미카제의 최초 공격 한 달 뒤다. 첫 출진 부대 이름은 기쿠수이(菊水). 대형 잠수함 갑판에 4대의 가이텐이 실렸다. 하지만 장래는 불길했다. 그 무렵 필리핀 레이테 만에서 일본 해군은 참패했다. 연합 함대는 재기 불능에 빠졌다.



 가이텐의 출격 의식은 엄숙했다. 비감을 억제했다. 단도 전달→훈시→신주(神酒, 정종 한잔) 마시기→유미유카바(海ゆかば, 바다로 가면) 합창. 노래는 대군(大君)에 대한 충성으로 끝난다. 단도는 할복의 도구. 남은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무운을 빌었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국을 만들었다. 일본군은 황군(皇軍)으로 재탄생한다. 국군이란 단어는 밀려났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그 시대 천황은 절대 충성의 대상이다. 거기에 사무라이식 죽음의 미학,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군신(軍神)으로 부활한다는 사고가 덧붙여졌다. 군국주의는 광기(狂氣)로 넘쳤다”고 했다.



 출항 12일 뒤인 11월 20일, 기쿠수이 부대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 잠수함은 서태평양 캐롤라인제도 울리티(Ulithi) 산호(珊瑚)섬의 미 해군기지에 다가갔다. 가이텐은 기습 돌진했다. 급유함 미시시네와(Mississinewa 25800t)는 굉음과 함께 격침됐다. 가이텐은 미군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바닷속 은밀한 침투는 가미카제보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였다. 미 함정의 레이더와 소나는 일본 잠수함을 신속히 포착했다. 기뢰가 투하됐다. 잠수함은 폭파됐다. 가이텐도 함께 파괴됐다.



 패전 22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가이텐은 미 호위구축함 언더힐(Underhill·1670t)을 격침시켰다. 그것으로 가이텐의 빈약한 임무는 끝났다. 우치다씨가 자료를 읽는다. “가이텐을 실은 잠수함이 일본에서 태평양을 가는 데 최소 열흘이 걸린다. 젊은 승무원들은 죽음의 각오를 장기간 유지하기 힘들었다. 밀실에 박혀 집중력을 잃었다.”



 기념관에 가이텐의 활약상이 적혀 있다. 출격 잠수함 연 32척(32차례), 탑재된 가이텐 연 148대(발). 이 중 가이텐 공격은 21차례다. 전과는 격침 3대(급유함+호위구축함+LST). 종합 성공률은 2%. 특공의 목표였던 항공모함·전함·순양함은 한 척도 없다. 가이텐 전몰자는 106명이다. 훈련 중 순직(15명), 자결(2명) 등을 빼면 출격 사망 대원은 80명이다. 2% 성공은 실패다. 무모한 공격의 무의미한 죽음이다. 기념관 안엔 실패라는 표현은 없다. 애국의 결단, 특공의 미화가 넘친다.



 전시실에 가이텐 희생 탑승원 106명의 사진이 붙어 있다. 연령은 28세에서 17세까지. 평균 연령 20.8세 -.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19명), 기관학교(12명) 등 직업 장교는 40명. 다수가 학도병, 요카렌(豫科練) 출신이다. 단도·군복·나침판·사각표·회중전등·해도가 진열돼 있다. 출격 결의를 담은 유언·유서들이 한쪽 벽을 채운다. 혈서가 눈에 띈다. ‘殉皇’(순황, 천황을 위해 죽는다). ‘挺身突擊(정신돌격), 必死 轟沈(필사굉침)’. 미군에 대한 적개심도 가득하다. ‘鬼畜美軍, 殺敵’(귀축미군, 살적). 17세 최연소 사망자는 요카렌 출신이다. 소년 티가 물씬하다. 그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이텐 모함인 이(伊)-58 대형 잠수함, 갑판 위에 4대의 가이텐 어뢰를 실었다(잠수함 길이 108.7m, 폭 9.3m, 잠항배수량 3688t). 가이텐 작전 중 전사한 잠수함 승조원은 812명. [사진 박보균 대기자]


전 시실 벽에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그들의 후세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야 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하지만 가이텐 부대 생존자는 그런 문구를 거부한다. 이와이 다다마사(岩井忠正·94)씨는 학도병 출신이다. 그는 "그때 군부의 거국일치 슬로건에 이용된 느낌이었다. 가이텐 어뢰를 봤을 때 오싹했다. 이것이 내 죽음의 관(棺)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2015년 2월 27일 블룸버그통신 일본지사)



전시된 가이텐 몸통. 내부에 복잡한 전선, 해치가 보인다. 벽에 붙은 가이텐 전몰자 사진. [중앙포토], [박보균 대기자]


 신사쿠 시대 무사도의 최후는 장렬했다. 가이텐 대원은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의 비장미는 사라졌다. 그것은 제국 일본의 절망적인 초상화다. 야만의 무기는 기적을 낳을 수 없다. 기념관에는 군국주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전쟁과 침략의 반성은 희미하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대본영은 본토 결전을 외쳤다. 제주도 해안에도 가이텐 진지 동굴을 만들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항복했다. 가이텐의 저항의지도 파멸됐다.





 바다를 뒤로한 기념석이 있다 ‘魚雷發射場跡’(어뢰발사장적) -. 여러 상념이 떠오른다. 일제(日帝)의 군국주의는 독특하고 잔혹했다. 일본 육·해군은 집단 충성, 집단 애국을 경쟁하며 생산했다. 집단 투혼은 소모적 돌격이다. 개인의 목숨은 귀중하지 않다. 황국(皇國)을 지키는 희생물이다.



 광복 70년, 일본의 패전 70년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군사력을 확장한다. 그 바탕에 우익 국수(國粹)주의가 깔렸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도 뚜렷하다.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를 잊지 않고 있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의 가상적이다. 러일전쟁(1905년)이 벌어졌다. 최강국과의 동맹은 일본 압승의 기반이다. 한 세기 후, 아베의 일본은 동맹의 진가를 재현하려 한다. 이번엔 미국이다. 일본의 전략은 선명하다. “중국을 앞장서 견제할 테니 미국은 우리 일본을 밀어 달라.” 미·일 동맹은 신(新) 밀월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미래를 보장한다. 지피지기는 역사의 감수성에서 출발한다.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 확대를 주시,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교류·친선도 강화해야 한다.



오쓰시마(야마구치현)= 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S BOX] 23세 두 젊은 대위, 가이텐의 구로키 히로시&가미카제의 세키 유키오



① 가이텐 창안자 구로키 히로시. ② 가미카제 첫 출격 지휘관 세키 유키오. 두 해군 대위는 23세로 숨졌다. ③ 제로센 전투기. [중앙포토]
1944년 일본 대본영 육·해군은 자살 특공에 몰입했다. 착수는 해군 수상부대 가이텐이 앞섰다. 실전은 해군 항공부대 가미카제가 먼저였다.



 가미카제 등장은 필리핀의 항공 지휘관 오니시 다카지로 중장이 주도했다. 44년 10월 레이테만 결전을 앞둔 때다. 제해·제공권은 미 태평양 함대에 넘어갔다. 오니시의 작전은 간단했다. “미 항공모함의 전투기 갑판을 부숴야 한다. 그래야 세계 최대 거함 야마토·무사시가 활약, 전세를 만회한다. 전투기째 적함에 부닥치는 특공밖에 없다.” 두 전함은 46cm 주포를 장착했다.



44년 10월 25일 첫 출격자는 세키 유키오(關行男, 23세, 해군병학교) 대위, 함상전투기 제로센(零戰)에 250㎏의 폭탄을 실었다. 전투기는 내리꽂혔다. 호위 항모 1척 격침. 전과는 미비했다. 하지만 미군이 받은 심리적 압박은 컸다. 세키는 군신으로 추앙됐다.



 가이텐은 가미카제에 비해 소규모다. 기술·장비 때문이다. 가이텐은 젊은 장교들 작품. 창안자인 구로키 히로시(23세, 해군기관학교) 대위는 훈련 중에 숨졌다. 극비 작전이어서 그의 사망도 비밀에 부쳐졌다. 고향(기후 현)에 구로키 신사가 있다.



 특공은 실패했다. 레이테 해전은 참패했다. 미 함대에 의미 있는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45년 8월 패전까지 2550대의 해·육군 특공대가 출격했다. 명중률은 475대, 18.6%다(가이텐 성공률은 2%). 전후에도 일본 우익단체는 특공을 미화, 전파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내막은 폭로된 지 오래다. 요미우리신문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전 회장은 “가마카제 대원이 용기와 기쁨에 차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출격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다(2006년). 2015년 90대의 특공 생존자 대부분은 ‘평화의 고귀함’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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