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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의 시시각각] 뇌물과 선물의 경계는 모호한가?

중앙일보 2015.08.14 00:06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철근
논설위원
“시계는 받았다. 그러나 대가성 없는 선물이다.”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검찰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그가 분양대행업자로부터 받은 시계 중에는 시가 3000만원이 넘는 해리윈스턴, 위블로 골드 등 명품이 즐비하다. 검찰은 일단 시계까지 포함해 기소한 상태다. 하지만 뇌물이 아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대가성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금도 아니고 시계를 정치자금으로 받았다니, 뭔가 어색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수천만원에 이르는 명품시계를 순수한 선물로 보기엔 너무 거액이다.



 미국에서도 공직자의 선물을 놓고 법정 다툼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 클린턴 정부 때 농무장관을 지낸 마이클 에스피 사건이다. 그는 농업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동창으로부터 5900달러 상당의 선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이 중에는 고급 가방, 크리스탈 접시, 스포츠경기 관람권 등이 포함돼 있었다. 1999년 연방대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에스피가 선물을 받을 당시엔 업무상 이해관계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우호적인 대우를 받으려는 일반적인 기대를 갖고 제공됐다면 위법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공직자가 현금이 아니라 현물을 받으면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오랜 기간 친분을 맺어온 사이라면 더욱 어렵다. ‘김영란법’ 제정의 단초가 된 ‘벤츠 여검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지난 3월 내연관계인 변호사로부터 벤츠 승용차와 샤넬 핸드백 등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모 전 검사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사랑의 징표로 받았다”는 피고인 측의 항변을 인정한 셈이다. 만약 이 전 검사가 현금을 받았다면 무죄를 끌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현물은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든다. 특히 명품은 부정한 거래에 효과적이다. 우선 받는 사람 입장에서 선물이라며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현금 거래보다 죄의식도 덜하다. 게다가 명품은 되팔더라도 가치가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특성 때문에 동서고금 역사상 뇌물로 애용돼왔다.



 박기춘 체포동의안이 13일 가결됐다. 새정치민주연합도 옹호론이 있었으나 금품액수(3억5800만원)가 너무 커서 계속 감싸주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박 의원이 현금을 안 받고 시계 한 점만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김영란법이 시행돼도 이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회에서 공직자가 아닌 사립대 교원과 언론인은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국회의원 등 선출직공무원의 민원은 부정청탁의 범주에서 슬쩍 뺐기 때문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김영란법에서 우리 농축수산물을 제외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논란에 휘말렸다. 김 대표는 이를 부인했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미 농어촌 지역 의원들 사이에선 국내 농축수산업계의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영란법 시행이 1년여밖에 안 남았다. 위헌 논란도 있는 만큼 시행 이전에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국회는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의원들이 명절 때 수십만원짜리 영광굴비세트를 받는 것은 괜찮고, 사립대병원 교수가 노르웨이산 연어세트를 받으면 처벌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동료의원의 명품선물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공무원이 아닌 이들의 명절선물까지 처벌하겠다는 ‘이중 잣대’로 과연 깨끗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반발과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세종은 대가성 없는 금품 수수도 처벌하는 조선판 김영란법을 만들었다. 그때 대사헌 신개는 강원도 고성군수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받았다가 파직 위기에 몰렸다. “관료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세상 여론이 어떻겠는가.” 세종은 상납을 받은 다른 관리들은 용서해 주면서 신개만은 문제를 삼았다. 부정부패를 몰아내려면 힘있는 고위직일수록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 형평성 시비를 없애야 한다는 것. 졸속으로 김영란법을 통과시킨 정치권이 세종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다.



정철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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