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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파리위원부, 국제회의서 첫 독립승인 받아냈다

중앙일보 2015.08.13 01:42 종합 4면 지면보기
김규식이 이끌던 파리위원부는 1919년 국제사회당 대회에서 한국 독립승인결의안(사진 왼쪽)을 통과시켰다, 서영해는 1930년대 이후 유럽에서 독립외교를 책임졌다.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사진 오른쪽)도 썼다.


“일본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려는 한국인들이 평화회의에서 활동하려 한다. 폐회 때까지 입국이 허가되지 않도록 해달라.”

외교가 힘이다 <2> 임시정부의 항일 외교
나라 뺏긴 뒤 국권회복 외교 계속
독립운동 소식지 발행 일제 고발
교황 “한국 핍박에 우려” 격려 서한



 1919년 1월 3일 프랑스 외무성에 대외비 문서가 도착했다. 주프랑스 일본제국대사관이 보낸 문서의 제목은 ‘한국인 입국 제한 요청’이었다. 일제가 경계한 대상은 신한청년당 김규식이 이끄는 대표단. 하지만 이들은 두 달 뒤인 3월 일제의 방해를 피해 파리에 도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처리 논의를 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3~6월)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해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파리에 머물고 있는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주파리위원부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임정 최초의 ‘외교 미션’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외교는 계속됐다. 일본에 대항한 임시정부의 항일외교였다. 1920년 임시정부 안창호 내무총장은 “군사와 외교가 독립운동의 절대적 수단과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임정 첫 해외 공관=파리강화회의 이후에도 파리위원부는 활동을 계속한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25개국이 모인 국제사회당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 첫 국제회의였다.



 파리위원부는 홍보를 위해 통신국도 설치했는데, 월간 『자유한국』을 발행했다. 1920년 4월부터 1921년 5월까지 32~36쪽 분량으로, 매호 1000부 발간했다.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제의 만행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한국 관련이 게재된 건수가 133종 423건이나 됐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도 “한국 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하기를 천주께 기구한다”는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냈다.



 #서영해의 공공외교=1930년대 이후 유럽 지역의 독립 외교는 서영해(1902~?)가 도맡아 했다. 1929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숙소인 말브랑슈 7번지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강연,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알렸다. 프랑스어로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이란 소설도 집필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이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일본의 압제를 서술했다. 3·1운동 선언문도 삽입했다. 서영해의 활동은 요즘으로 치면 ‘공공외교’다. 그가 1940년 7월 20일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엔 선진 공공외교의 개념이 담겨 있다. 그는 “고려통신사의 활동은 조국 소개, 왜(倭)놈 외교와 선전(宣傳)을 방언(防言·말로 막아냄)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이어 “외교와 선전의 방책은 오직 진실하고, 광명정대하여 세인의 신용과 존경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4월 29일) 직후 일제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체포했을 때다. 서영해는 각 언론사에 ‘유럽의 양심에 고함’이라는 자료를 배포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여론이 들썩였고, 프랑스인권연맹회장이 외무성에 “프랑스는 명성을 저버리고 평화주의자들인 한국인들을 가해자들에게 주저 없이 넘겼다”고 항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이징과 상하이 공관을 통해 일본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11명 중 7명은 풀려났다.



 #임정, 국제 승인을 받다=파리강화회의 실패 후 임정은 혁명에 성공한 소련으로 눈을 돌린다. 1919년 12월 상하이로 온 러시아 장성 포타포프는 임정 인사들에게 레닌을 만나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한다. 임정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측근인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낸다. 1920년 5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형권은 레닌을 만나 ▶임정 승인 ▶독립운동 자금 지원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위한 학교 건설 ▶독립군 무장 지원 등 4개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레닌은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로 한 뒤 40만 루블의 군자금까지 줬다. 단국대 한시준(사학과) 교수는 “소련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 첫 번째 승인을 받은 것”이라 고 말했다.



 파리강화회의 후속 조치를 위해 미국이 워싱턴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를 소집하자 임정은 중국 쑨원(孫文)과도 교섭했다.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가 태평양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921년 10월 임정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이 특사로 광저우로 간다. 신규식은 쑨원과 2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신규식은 “임정은 호법정부를 승인한다. 호법정부 역시 임정을 승인해달라”며 교차 승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쑨원은 “한·중은 서방의 영·미와 같다. 중국은 마땅히 원조할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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