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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는 ‘헤이그 특사’ … 그는 1920년대까지 일본과 싸웠다

중앙일보 2015.08.13 01:36 종합 6면 지면보기
‘사라진 특사’ ‘비운의 독립운동가’.


세련된 영어·매너 ‘한국 왕자’ 불려
헤이그 호소 실패 뒤 안중근과 합세
‘동의회’ 조직 … 연해주서 항일투쟁
1911년 부친 자결하자 ‘군인의 길’
혁명군 가입 뒤엔 시베리아서 활약
실종된 유해 찾아 조국 모시고 싶어

 제 증조할아버지 이위종 지사를 이르는 말들입니다. 그는 조선의 양반에서 러시아제국의 장교로, 다시 혁명정부의 공산당원으로 여러 번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만큼은 저버리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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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사는 20대 초반인 1907년 6월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상설·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습니다. 헤이그 특사 3인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 지사가 외신 기자들 앞에서 한 연설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서약이 없는 을사조약은 명백한 불법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밴 이 지사를 “대한제국의 왕자”라고 소개한 언론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헤이그 특사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통령 면담을 시도하고 영국·프랑스 등을 돌며 국권 침탈을 막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조선 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범진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 지사의 유년 시절은 풍족했다고 합니다. 1896년 이 지사는 미국 공사를 맡게 된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처음 조선 땅을 떠났습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공사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그때 그는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러시아 귀족인 바레리안 카를로프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오페라극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해요. 한국식 복장과 유교문화를 중시했던 이범진 공사와 달리 이 지사는 서양식 제복을 입고 오페라 공연도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증조할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로 개종까지 했습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가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 지사는 아버지 뜻에 따라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가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아버지인 이범윤,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위한 ‘동의회’를 조직했죠. 고종 황제의 비밀 서한을 러시아 왕실에 전달하거나 극동 지역에 군자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고문서에선 ‘왕족 리’로 불렸다고 해요. 러시아 이름 ‘블라지미르 세르게예비티 리’도 썼고요.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당(黨)에 가입한 이후로는 ‘당원번호 462983’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국권이 일제에 침탈된 다음해인 1911년 이범진 공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이 지사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제국의 군사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됐고요. 이 지사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었던 증조할머니 엘리자베타에게는 1916년 실종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연락이 끊어졌죠. 한국에서 한때 이 지사가 1916년 전사 통지를 받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1920년대까지 일제와 싸움을 계속했다는 기록이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습니다.



 1918년 4월 러시아 혁명군(적군·赤軍)에 들어가 극동 지방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대표적인데요.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모스크바의 한인집회에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해 일제를 몰아내자”는 연설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그를 러시아 영토 밖으로 추방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했다고 합니다.



 일본 외무성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가 1921년 10월 6일 본국으로 보고한 ‘배일선인(背日鮮人) 이위종에 관한 건’이란 기록에는 일제가 이 지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위종이 1921년 8월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공산주의 선전비 명목으로 많은 돈을 갖고 중국 만주와 접경한 블라고베셴스크 지역으로 왔다가 무고로 현지에서 붙들려 돈을 빼앗긴 뒤 투옥됐다. 이후 시베리아 중부인 치타 지역으로 갔다’.



 러시아 외교부 문서에 1924년 10월 치타 지역의 국영기업 감독관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몇몇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30~38년 스탈린이 당내 반(反)스탈린파 공산당원·군인 및 고려인 등 소수민족을 탄압한 사건) 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뿐입니다.



 과연 그는 1945년 조국의 해방을 보았을까요. 아니면 끝내 이루지 못한 독립의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이역만리 땅 어딘가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의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모셔오고 싶습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위종 지사의 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46)의 증언과 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율리아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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