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P “차지철의 월권 행위, 박 대통령은 알면서도 허용” … 차 실장, 총리를 휘하에 둔 특별경호위원회 조직했다

중앙일보 2015.08.10 00:29 종합 12면 지면보기
1977년 1월 17일 청와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부처 초도순시에 쓸 책걸상에 직접 앉아서 점검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신임을 독점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다. 그 옆에 이광로 경호실 행정차장보(왼쪽)와 전두환 작전차장보(왼쪽 둘째)가 서 있다. 전두환 차장보는 열중쉬어 자세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역사의 비극은 1974년 차지철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긴 박정희 대통령 옆의 빈자리를 차지철이 파고들었다.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한 사람이 생전의 육 여사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68> 차지철의 안하무인
35세에 국회 외무위원장 벼락감투
차지철 중절모에 오버코트 빼입어
JP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 느껴”



 공수단 중대장(대위)으로 5·16혁명에 참여했던 차지철은 63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7·8대(광주-이천), 9대(광주-이천-성남-여주) 총선에 지역구에서 내리 당선됐다. 그는 재선 때인 69년 의정 사상 최연소(35세) 외무위원장에 오르자 중절모자에 오버코트를 빼입고 가끔은 보타이까지 하고 다녔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웃음이 나기보다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차지철은 “복장을 이렇게 갖춰야 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책임 있는 사람의 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경호실의 위상을 제멋대로 끌어올렸다.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와 33대대를 여단급으로 격상시켰다. 경호실차장에 현역 소장을,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신설해 현역 준장을 임명했다. 경호실차장에는 정병주·문홍구(이상 육사 9기)·이재전(8기)을 차례로 기용했고, 작전차장보로는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김복동을 연이어 임명했다.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지고 포병간부로 임관해 62년 중령으로 예편한 차지철이 현역 장성들을 거느린 막강한 경호실장이 됐다.



 차지철이 벌인 기행(奇行)은 한둘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열린 경호실의 국기하강식은 차지철을 위한 한 편의 쇼였다. 경복궁 경내 수경사 30단 연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엔 경호원들과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부대 장병들이 도열하고 전차를 포함한 경호실 무기가 위력을 과시했다. 차지철은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에 맞춰 지휘봉을 들고 초청인사들과 함께 입장해 단상에 앉아 지켜봤다. 정부 부처 장·차관과 국회 상임위 위원장들은 물론이고 기업과 학계,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까지 조를 이뤄 이 행사에 초청됐다. 대한민국에서 이름 좀 알려진 인물은 죄다 불려 갔다고 보면 된다. 국기하강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실력자인 차지철이 오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참석했다. 국회의장이던 정일권 전 총리도 차지철이 불러서 국기하강식에 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차지철은 초청인사들에게 “대통령께서 일하시는 데 방해되는 일을 일으키면 보고만 있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정 의장이 연병장에 있는 전차를 보고 “왜 이곳에 전차를 갖다 놓았소?”라고 묻자 차지철은 “부작용이나 일으키는 자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고 말했다.



 차지철은 국기하강식에 나도 불렀다.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나는 ‘별짓을 다 하는구나’라고 취급하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차지철이 내게 “주요 인사를 모두 초청해서, 국무총리(최규하)와 국회의장도 다들 오셨는데 왜 안 오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난 주요 인사가 아니야.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못 가지”라고 답했다. 나는 그때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민주공화당 총재고문으로 있었을 때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가 “아니, 오셔야 합니다. 한번 보셔야 합니다”고 하기에 “기회 있으면 한번 보지” 하고 건성 대답하고는 말았다. 차지철에겐 내가 만만치 않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도 그때 한 번 물어봤을 뿐 그 이상은 날 어쩌지는 못했다.



1977년 6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태릉 국제종합사격장에서 열린 정부 각부처 대항 사격대회에 참석해 망원경으로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뒤쪽은 차지철 경호실장(왼쪽)과 최규하 국무총리. [중앙포토]


 차지철은 ‘대통령경호위원회’라는 희한한 특별기구도 만들었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라고 했다. 그런데 그 기구의 위원장이 차지철이고, 국무총리(최규하)를 포함해 국방 ·법무 ·내무장관 등이 모두 그 밑에 위원으로 돼 있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조직 체계였다. 나는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박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말씀을 드렸다. “이런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차지철이가 무언데 국무총리 위에 앉아서 위원장을 합니까. 이 일을 각하도 다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박 대통령은 “뭐, 자기들이 다 합의를 봐서 그렇게 했다고 그러대”라고 대답했다. 나는 “국무총리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됩니다. 고치라고 하시지요”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내버려 둬. 본인이 승인했다는데 뭐”라며 어물쩍 넘어갔다. 박 대통령은 속으로는 차지철의 행동을 충성스럽게 여기고 받아들인 듯했다.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나로서도 거기에 대고 더 드릴 얘기가 없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1971년 9월 대정부질문 답변을 위해 국회를 찾은 김종필 총리와 정일권·차지철 의원(왼쪽부터).
 차지철이 이끄는 대통령경호위원회가 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그중 하나가 청와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의 북쪽 모든 창문에 가림막을 설치하게 한 일이다. 79년 완공된 롯데호텔은 지상 37층으로 국내에서 최고층 건물이었다.



 옛 반도호텔 자리에 지은 롯데호텔은 당초 40층이 넘는 초고층으로 설계됐는데, 차지철 실장이 74년 취임한 뒤 경호에 지장이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결국 당시 국무총리였던 내가 나서서 박 대통령께 말씀드린 끝에 37층으로 조금만 낮춰서 지을 수 있었다. 그때 차지철은 3개 민간 방송사가 투자해 세운 남산전파탑(현재 서울타워)도 청와대가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허물려고 했었다. 이 역시 내가 “남산전파탑은 민간 소유입니다. 민간인이 자기 돈 들여서 만든 것을 무슨 권한으로 허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고 대통령께 건의를 올려서 막았었다.



 그런데 롯데호텔이 완공되고 나니 이번엔 한쪽 편 창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냥 둬서는 안 되겠기에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때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의 면담 일정에까지 관여하던 때였다. 하지만 차지철은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비서실장(김계원)을 통해 대통령을 뵈어야겠다고 연락하면 나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을 만나 “호텔에서 청와대가 내려다보인다고 창문을 막으라고 한 겁니까. 누구의 생각인지, 어리석고 우매한 짓입니다. 한쪽 창문을 모두 가리면 손님들이 불편할 텐데, 왜 그런 일을 허가하셨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거기서 청와대 내려다보인다고 해서 위원회가 그렇게 결의했다고 하기에 나도 동의를 했지. 뭘 그래?”라고 답했다. 나는 재차 간곡히 말씀드렸다. “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가면 고층 건물이 있는데 그 위에선 일왕이 사는 궁성이 환히 내려다보입니다. 그래도 아무도 위험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건물에서 궁성까지 거리가 1200m쯤이고, 롯데호텔은 청와대에서 2000m 가까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소총은 유효 사거리가 600야드(549m)밖에 안 되니까 롯데호텔로 대포를 갖고 올라가서 쏘지 않는 이상 탄환이 청와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공연히 민심만 흉흉하게 만들어놓는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런 것을 왜 허가하십니까. 잘했다고 하셨습니까?” 박 대통령은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하셨다. 결국 롯데호텔의 가림막은 다 걷어버렸다. 훗날 박 대통령을 쏜 총탄은 고층 건물이 아닌 청와대 턱밑 궁정동 안가에서 발사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행위를 다 알면서 허용했다. 대통령은 차지철이 하는 일을 잘한다고 말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경호실장이 그렇게 한다는데 두고 봐야지”라는 말로 옹호했다. 잘한다는 말보다도 더 강력하게 차지철에게 신임을 주는 말이었다. 그러니 차지철은 갈수록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됐다. 박 대통령 특유의 분할통치식 용인술은 무뎌졌고 세력 간 견제와 균형은 깨졌다. 쓸 만한 인사들은 박 대통령이 스스로 멀리했다. 차지철의 독주(獨走)는 가속화됐다.



◆롯데호텔 설립=1973년 4월 정부는 롯데 주식회사의 대규모 호텔 건설을 위한 18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을 인가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삼성·선경(SK)·한진 등 대기업들이 잇따라 호텔사업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롯데는 총 4800만 달러를 들여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과 국립도서관, 중식당 아서원 자리를 합친 대지 7000평(약 2만3000㎡)에 호텔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지상 43층이던 설계는 37층으로 수정됐지만 여전히 국내 최고층 호텔이었다. 79년 3월 완공까지 총 750억원이 투입된 롯데호텔은 객실 1020개로 호텔 규모 면에서도 최대였다. ‘국제적인 면모를 살린다’며 건축자재는 물론 숟가락·접시까지 거의 모든 것을 일본에서 수입해 화제가 됐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정병주(1926~89년)=전두환 세력이 일으킨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특전사령관(소장·육사 9기)이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체포됐다. 체포 당시 총격전을 벌이다 골절상을 입었으며 그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피격·사망했다. 정 사령관의 예하 부대장들이었던 박희도 1공수(육사 12기)·최세창 3공수(13기)·장기오 5공수(12기) 여단장은 명령체계에서 이탈해 전두환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의 신군부 편에 섰다. 정씨는 80년 강제 예편된 뒤 12·12의 부당성을 꾸준히 주장했으며 89년 북한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