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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안 풀리는 한일·남북관계, 한·중·일 협력에 답이 있다

중앙일보 2015.08.10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강찬호
논설위원
중국은 1972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난징에서만 중국인 30만 명을 죽인 일본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일본 인민들에게 짐이 되니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이는 마오쩌둥 주석의 결단”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본의 입이 딱 벌어졌다. 7년 전 한국에 배상한 5억 달러(유·무상)의 100배는 줘야 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본 측 다케이리 요시카쓰 공명당 위원장은 “500억 달러는 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우 총리를 만났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회고했다. 감격한 일본은 매년 수십억 달러의 공적개발원조금을 중국에 뿌렸다. 지난달 미쓰비시가 제2차 세계대전 때 강제노역한 중국인 3765명에게 보상을 약속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본의 대중 외교도 통이 크다. 72년 2월 닉슨 방중에 경악한 일본은 그해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베이징으로 날아가 나흘 만에 국교를 튼다. 미국보다 7년이나 앞선 결단이었다. 중국이 천안문 학살로 고립무원 신세가 됐을 때도 일본은 유일한 친구가 돼준다. 미국의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사상 처음으로 일왕이 베이징을 찾아 우호를 과시한 것이다.



 중·일은 아시아의 ‘빅 2’다. 두 나라는 세계 인구의 25%,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한다.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것도 중·일 간 ‘72년 체제’가 형질 변화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일본을 누르고 글로벌 2위 대국에 오르고, 이에 놀란 일본이 미국을 업고 방어에 나선 게 진앙의 핵심이다. 우리가 펄펄 뛰며 반대하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확대도 이런 맥락에서 진행 중이다. 안타깝게도 과거사나 북핵은 이런 동북아 현실정치(Real Politics)에서 부차적인 이슈로 격하된 지 오래다.



 중·일은 외교도 스케일이 다르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 중국도 우리처럼 일본을 맹비난하며 정상회담을 보이콧한다. 그러나 다자회담 무대에서 일본 총리를 만나는 편법으로 양자회담을 이어간다. 지난해 일본을 ‘르커우’(日寇·도적)라 비난한 지 몇 달 만에 기습적으로 아베와 정상회담을 한 시진핑은 그 전형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이 잃을 게 더 많다”고 극언하면서도 뒤로는 끊임없이 정상회담을 하자고 베이징을 조른다.



 중·일 관계가 좋아지면 우리가 고립된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실은 그 반대다. 중·일이 갈등할수록 한·미·일 3각 동맹으로 일본과 연결된 한국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오히려 중·일 간에 대화 여지가 있을 때 잽싸게 양쪽 등을 떠밀어야 우리 입지가 커진다.



 확신범 아베가 총리로 있는 한 우리가 일본과의 양자관계에서 답을 찾긴 글렀다. 하지만 한·중·일 3자의 틀로 접근하면 다르다. 당장 일본은 박근혜 대통령의 한·중·일 정상회담 제안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중국 역시 “아베 담화를 보고 나서”란 조건을 달았지만 3국 정상회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에 원심력으로 작용했던 미국도 한·중·일 정상회담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미국이 기피하는 중·일, 한·일 갈등을 한꺼번에 완화하는 묘수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2년반이 지났다. 남북과 한·일 관계 어느 하나 풀린 게 없다. 딱히 우리 정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중국 문제(China Question)’가 동북아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북한 문제와 한·일 관계가 밀려났기 때문이다. 미국·일본과 중국이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을 놓고 거대한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발상을 바꿔야 한다. ‘중국 문제’의 핵심인 중·일 관계에서 나름의 역할을 찾아 입지를 확보하는 쪽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 주도로 한·중·일 대화의 틀이 갖춰지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끌어낼 수 있고, 북한의 참여도 유도할 수 있다. 한·일,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열리는 것이다. 중·일에 우리는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무시할 수도 없는 상당한 존재다. 자신감을 갖고 ‘한·중·일 균형자’가 돼 보자.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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