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론] 한국, 아베 담화에 일희일비 말자

중앙일보 2015.08.10 00:05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아베 담화 발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종전 70년을 맞아 과거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일본이 어떤 공헌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담화를 발표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일국의 지도자가 역사적 시기를 맞아 자국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 비전을 공표하겠다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정치외교적 행보다. 그럼에도 왜 유독 아베 담화가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중국·미국 등 국제사회의 뜨거운 이슈가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이 워낙 위험천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베 총리는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설 때부터 미야자와 담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겠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적 자세는 일본 정치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보더라도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칠 뿐 아니라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 정책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든가 “위안부 강제 모집의 증거가 없다”는 식의 우익사관을 주장해왔기에 그의 담화에 세계인이 주목하는 것이다.



 역대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 대한 가혹한 식민통치와 중국·동남아·미국으로 이어진 15년간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정부 담화나 총리 발언, 공동성명 등으로 일관되게 표명해 왔다. 정부의 공식 담화만 보더라도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 2005년의 고이즈미 담화를 통해 과거사에 대한 사죄 표명이 이뤄졌다. 93년에는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2010년 한국병탄 100주년 총리 담화에서도 한반도 식민통치가 ‘조선인의 의지에 반해서 행해졌다’고 반성한 바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는 망언이 우익 정치인들에 의해 반복되면서 사죄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상황을 낳았다.



 아베 총리는 전문가와 오피니언 리더로 구성되는 ‘21세기 구상 간담회’에서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고, 이번 담화를 각의를 거치지 않은 형태로 조기에 발표하겠다고 천명했었다. 담화에 대한 야당과 여론의 날 선 공세를 피해 보자는 의도였다.



 그런 탓인지 일본 국내에서는 이번에 나올 담화가 ‘아베 담화(정부의 공식 담화)’인가 ‘아베의 담화(총리 개인의 담화)’인가를 논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논의까지 일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부의 역대 담화를 ‘전체로서’ 계승하겠지만 역대 담화에 나온 단어 하나하나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언급함으로써 세간의 의심을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여론은 아베 총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과반수 국민이 담화의 핵심인 역사관과 관련해 식민통치, 침략전쟁, 반성과 사죄 등 네 가지 단어를 분명히 표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당초 개인 자격의 담화로 발표하겠다고 천명했다가 최근에 각의 결정을 하겠다고 방향을 튼 것도 여론의 날 선 공세를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연립정권의 일각을 구성하는 공명당은 지속적으로 이번 담화에 사죄를 명확히 표현하라고 주장해왔다. 일본 보수계의 거목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7) 전 총리도 지난 7일 요미우리신문 기고문에서 “(한국과 중국) 민족이 입은 상처는 3세대 100년간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함께 언동은 대단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 아베 정권은 무리하게 안보 법안 처리를 밀어붙였다가 민심 이반에 직면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정권 출범 이래 처음으로 아베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비율이 지지하는 비율을 훨씬 웃돌게 됐다. 안보 법안과 더불어 원전 재가동,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도 아베 총리가 거센 비판에 맞서 돌파해야 할 난제다.



 국수주의 역사관을 지닌 아베 총리의 담화에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식민통치에 관한 수준 높은 사죄와 반성이 포함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베 총리가 역대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표명해 온 속죄론적인 역사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결국 아베 담화는 역대 담화의 기본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역사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아베 총리의 입만 바라보며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즉 아베 담화에 실망하기보다 지나치게 악화된 한·일 관계를 개선해 균형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아베 정권과 당장의 외교관계도 중요하지만 역사 화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번영을 염원하는 일본 국민과의 관계 정립을 염두에 둔 중장기적 포석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역사수정주의 드라이브를 거는 아베 총리만 보지 말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 일본 국민을 보고 외교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도덕적 우위에 서서 당당하게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되 외교안보·경제·사회문화 등의 영역에선 총체적인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대일정책을 추구할 때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