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선 2035] 고백을 부탁해

중앙일보 2015.08.07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혜미
JTBC사회부 기자
몇 년 전 겨울, 한 언론사의 기자 채용 면접장.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는지 말해 볼래요? “약 20분간의 개인 면접 뒤 마지막 질문이 던져졌다. “저는…이미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잘 다린 정장을 빼입고 얼굴에 곱게 분칠을 한 내가 대답했다. “또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건데요?” “또 떨어지면…한바탕 울고 다시 해봐야죠.” 분명 웃었는데 주책없이 목이 메었다.



 면접장에서 이런 ‘찌질한 고백’은 처음이었다. 으레 대답은 “중문학과 언론학을 이중 전공하며 글로벌 마인드와 날카로운 시각을 갖추고…”로 시작했어야 했다. 더욱이 다른 회사가 ‘버린’ 사람이란 걸 알려서는 안 됐다. 그런데 느닷없이 ‘장수생의 고백’이 튀어나온 거였다. 새로운 면접 전략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진심이었다. 그때, 나를 가만히 보던 한 면접관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많이 떨어져 봤는데, 원래 훌륭한 사람이 좌절이 많아.” 뻔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는 이렇게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이 경험을 이후 ‘합격 후기’란 이름의 글로 남겼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인터넷에 글이 돌아다니는 통에 요즘도 “글을 읽고 다시 도전할 용기가 났다”는 e메일이 오곤 한다. 그 찌질한 고백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린 셈이다. 요즘 일반인이 출연해 일기장에나 남길 법한 고민을 서로 나누는 TV 프로그램이 부쩍 늘었다. 수십 곳의 지하철역에는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끼리 간식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달콤창고’란 게 생겼다는 소식도 들린다. 나처럼 소소한 고백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증거다.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는 심지어 “마크의 고백에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말이다. 저커버그는 최근 딸을 임신한 소식과 함께 과거 세 차례의 유산을 경험했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느꼈던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공유하는 데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그 자리에서 친구의 임신과 유산 소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었다. 친구의 고백은 결혼 후 임신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내게도 꽤 큰 힘이 됐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애플 CEO 팀 쿡의 고백은 결과적으로 나라까지 바꿨다. “자신의 인정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느낀다”던 그의 말대로 미국은 동성애를 인정하는 나라가 됐다.



 어려움을 피해 보려 애를 써봐도 어디에서건 꼬이고 얽히는 게 인생이니까.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와 남의 건강한 고백에 기대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고백을 부탁해”.



김혜미 JTBC사회부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