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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케라시스 샴푸와 북한 나비효과

중앙일보 2015.08.06 00:05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
개성공단 노동자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노보물자. ‘노동력 보호 물자’의 약자로 작업복·장갑을 뜻했던 노보물자는 초코파이·라면 등 간식을 거쳐 치약·칫솔·조미료 등 생필품으로 확대됐다. 요즘엔 케라시스 샴푸가 대세다. 입주업체 측에서 제공하는 물량은 1인당 60~80달러 선. 사람마다 몇 박스씩 챙겨간다. 입주업체의 한 대표는 “남자들이 샴푸를 왕창 받아다 어디에 쓰려고 저러나 했다”고 한다. 샴푸는 공단 밖 유통업자에게 넘어가 평양 장마당(시장 격)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한국산 샴푸는 평양의 특권층이 주로 소비한다. 북·중 국경을 통해 암암리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중국 유통망을 통하다 보니 짝퉁(위조품) 걱정은 평양 특권층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개성공단 유통망을 거치는 게 최상등품 취급을 받는다. 남북 관계 경색 8년째. 인적 교류는 대부분 끊어졌지만 생필품은 이렇게 수요와 공급의 실핏줄을 이뤄 흐르고 있다. 공단 직공이 5만 명을 넘으니 노보물자에 매달 투입되는 비용이 적어도 300만 달러에 달한다. 마냥 무시할 만한 규모도 아니다.



 1960~70년대 푸젠(福建)성 인근 바다에서 대만과 중국의 상인들이 고용한 어부들은 배를 띄워놓고 보온병·치약 같은 생필품과 수산물을 몰래 주고받았다.



 양안(兩岸, 중국·대만) 간 ‘3통(통상·통항·통신)’도 없던 80년대였지만 생필품 밀매는 양성화됐다. 샤먼(廈門) 앞바다 다덩다오(大嶝島)에 소규모 상업 시장이 열렸다. 포격전으로 유명한 진먼다오(金門島)와 닭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척이었다.



 일종의 변경무역이었던 다덩다오장(場)은 95년 무관세가 적용되는 ‘대만 소액상품 거래시장’으로 확대됐다. 당일 대만에서 들어온 신선식품과 공산품이 암시장 가격보다 최대 30% 저렴했다. 생필품 수요와 공급이 쌍방에 이익이 되면서 얼음장 같았던 양안에 해빙의 틈을 벌린 것이다.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이 컸던 대만은 대륙의 구심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3통을 거부했다. 그런 대만을 상대로 대륙은 상업 거래부터 숨통을 틔우기 시작해 이제는 연간 1000만 명이 오가는 교류협력 시대를 열었다. 40년 이상의 긴 안목으로 이뤄낸 접촉을 통한 변화다.



 케라시스 샴푸가 북한에 준 충격을 가늠하기 이른 시점이지만 장마당의 수요가 고급 소비재로 확대되고 세분화되고 있는 현실은 역동감 있게 다가온다.



 우리에겐 이런 기회의 섬이 많다. 연평도뿐 아니라 지난 10년간 대선 캠프에서 주목하던 강화 교동도 앞 청주벌도 남북의 농수산물·생필품이 깔릴 수 있는 시장터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서독의 통일 전략가들은 받지 않으면 스스로 기회 손실이 되는 현실적 카드로 접촉면을 넓혔다.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의 미래에 북한은 신성장동력이자 제2의 내수시장 아닌가. 거창한 경제특구나 공단, 철도 인프라 연결만이 길이 아니다. 양안은 시장부터 시작했다.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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