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읽기]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즐거우려면

중앙일보 2015.08.05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평양 방문을 추진했다. 첫 남북 정상회담 상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재회하고 싶었다. 6·15 공동선언에서 ‘조속한 답방’을 문서로 약속하고도 김 위원장이 차일피일하자 재방북을 결심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5월 금강산에서 실무협의가 열렸다. 동교동 측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북측에선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마주했다.



 그런데 벽두부터 돌출변수가 생겼다. 북한이 김 전 대통령에게 ‘김일성 조문’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 전 장관은 “귀측 요구에 응하면 DJ는 물론 6·15 세력 모두가 국민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될 것”이라며 받아쳤다. 결국 북한은 판을 깼고, 동교동 측은 기자회견을 열어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징후 등 정세 문제로 방북이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조문 운운한 건 비밀에 부쳤다. 얼마 전 기자와 만난 정 전 장관은 “차마 조문 요구 때문이라고 밝히기 어려워 다른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앞서 정상회담 준비 비밀접촉 때 북측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미라 형태로 보관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현재는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 방문을 강권했다. 밀사 역을 맡은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절대 안 될 일”이라며 버텼다. 정상회담 개최가 하루 늦춰지는 진통을 겪었다. 만찬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임 원장에게 귀엣말로 “조문 문제는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6년 후 전직 대통령 DJ에게 조문 카드는 다시 돌아왔다.



 5일 시작된 이희호 여사의 방북 발걸음에 눈길이 쏠리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혹시 북측이 금수산 방문과 조문을 집요하게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다. 3박4일로 짜인 일정표에는 대표적 산부인과 병원인 평양산원과 애육원 등이 포함됐다. 조문 관련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동교동과 평양 측이 조문이나 조의 표명 연장선에서 교감·교류해 왔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여사는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상주(喪主)인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직접 만나 조의를 표했다. 지난해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5주기에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남측에 김정은 명의 조화를 전달했다. 또 12월에는 이 여사가 김정일 3주기에 맞춰 조화를 보냈다. 그러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방북 초청 친서로 화답했다. 북한이 3년7개월 전 조문 전례를 들어 금수산행을 돌발 제안할 경우 방북단이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19명의 방북단에 취재기자가 배제됐고, 임동원·정세현 등 노련한 대북 전문가 그룹이 빠진 점도 찜찜한 대목이다.



 이희호 여사 일행의 평양 방문은 남북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상황에서 가까스로 성사됐다. 6·15 공동선언 15주년 남북 공동행사는 무산됐고, 광복 70주년 8·15 행사도 불발될 공산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북한 선전매체의 거친 비난은 도를 넘었다. 이달 하순엔 북한의 대화 거부 단골메뉴인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잡혀 있다. ‘개인 차원’이란 당국 설명에도 이 여사 방북에 기대감이 증폭된 이유다.



 김정은 제1위원장 입장에선 이 여사에게 깍듯한 예우를 해야 할 판이다. 어렵고 힘들 때 위로의 손길을 뻗쳐준 참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친상을 당해 황망해 하던 27세 후계자 김정은을 만나러 고령(당시 89세)의 전직 대통령 영부인은 혹한 속에 평양으로 달려갔다. 남한 내 비난 여론을 무릅쓴 행보였다.



 하지만 이번 방북 협의 과정에서 드러난 북측 태도는 실망스럽다. 이 여사가 직접 뜨개질한 영·유아용 보온 털모자를 평양에 가져가겠다고 하자 북한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 건 우리 원수님(김정은)이 다 해결해 주신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우리 언론의 대북 비판을 문제 삼아 “방북이 허사가 될 수 있다”며 파기를 위협했다. 최고지도자가 초청한 이 여사까지 대남 압박 소재로 동원하는 결례를 저지른 셈이다. 고인이 된 DJ와 김정일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통탄할 일이다.



 노동당 간부와 대남 전략가들의 어려운 입장이 이해가는 구석도 있다. 권력 최고 실세들이 하루아침에 죽어나가는 공포정치 속에서 운신의 폭은 없어 보인다. 최고지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과잉 충성경쟁과 교조적 집행만이 미덕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 여사의 방북마저 북한 체제 선전이나 대남 비방의 소재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중요한 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중심을 잡는 일이다. 조문 요구 같은 꼼수로 이 여사 일행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귀환길엔 선물도 한아름 안겨줬으면 싶다. 이 여사는 방북 전 “6·15 공동선언 조항을 남북이 다 지키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산 상봉과 경협, 사회문화 교류가 알맹이다. 광복 70주년와 추석(9월 27일)을 계기로 한 이산가족 만남이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북한 당국이 억류한 김정욱 선교사 등 우리 국민 4명을 당장 가족품에 돌려보낼 수 있는 것도 김 제1위원장뿐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초청장에서 “평양을 방문해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시라”고 밝혔다.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졌으면 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