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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역사는 노래방에서 이뤄진다

중앙일보 2015.08.05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노래방까지 갔어.” 단순히 노래방에 다녀왔다는 뜻이 아니다. 모임이 밥·술·노래의 ‘풀 코스’로 이어져 많이 피곤하다는 의미다. 푸석푸석해 보이는 얼굴이 지난밤의 격렬한 전투를 증명한다. 그쯤은 돼야 진정한 회식으로 인정받으며 참석자 몇몇의 페이스북에 오른다.



 이런 3박자 음주문화의 보편화는 20여 년 전에 시작됐다. 1991년 5월 부산시 광안리의 ‘하와이비치 노래연습장’이 국내 노래방 1호로 공식 등록된 뒤 1년 만에 전국에 1만 개 넘는 업소가 생겨났다. 지금은 3만 개가량 있다. 중국음식점보다 흔하다.



 팡파르 효과음과 함께 화면에 번뜩이는 100점 표시에 너도나도 용기를 얻었다. 전 국민의 가수화가 K팝 성공의 원동력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볕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노래방은 탈선의 무대로 악명을 떨쳐왔다.



 공분을 사고 있는 서울 G공립고의 성추행 사태는 노래방으로 이어진 지난해 2월의 회식 자리에서 비롯됐다. 50대 교사가 20대 여교사에게 신체적 접촉을 시도했고, 거부하던 여교사의 옷이 찢겨나갔다. 성폭행 논란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한 심학봉 의원이 문제의 40대 여성과 ‘친분’을 쌓기 시작한 곳도 노래방이다. 지방의 한 대학총장은 노래방에서 여교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최근 기소됐다. 정치인·검사·교수·고위 관료·의사…. 노래방에서의 일탈로 망신한 사람들의 직업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 와중에 ‘노래방 성범죄 전문’이라고 홍보하는 변호사와 법률사무소도 생겨났다. 가해자·피해자 양쪽 모두에게 전문적이라고 자랑한다.



 알코올 기운과 어둠, 흥을 돋우는 노래에 체면 뒤에 감춰져 있던 욕망들이 꿈틀대는 것일까. 남자들은 “오빠 한번 믿어봐” “무조건 달려갈 거야”를 목청껏 외친다. 함성과 박수에 진짜로 자신이 멋있게 노래한 줄 안다. 여성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의 ‘그대’ ‘당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아저씨들이여, 노래방 문턱을 넘을 때 한 번의 경거망동이 개인의 역사를 바꾼다는 것을 상기하라.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의 시발점이 바로 오늘일 수 있다. 당신이 눈길을 보낸 그 여성이 노래로 애절하게 찾는 그대·당신은 느끼하게 추근대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절대 아님도 기억하라. 한 가지 더. 노래방에서 집에 가는 길에 ‘잘 가고 있어?’ 이런 카톡 문자 날리지 마라. 그 순간 그녀는 ‘짱나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당신 욕하는 메시지를 애인에게 쓰고 있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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