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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미안하다 답이 없다

중앙일보 2015.08.04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전두환 정권 때 ‘정화위원장’이란 감투를 쓴 적이 있다. 국민학교 5, 6학년 무렵의 일이다. 불순분자들을 색출해 삼청교육대로 보내는 이른바 ‘사회 정화’ 작업이 학교까지 밀어닥친 거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앞으로 넌 학급 회장이 아니라 학급 정화위원장이다”고 하셨다. “싫어요. 무슨 정화조 청소 담당인가요. 그런 거 안 해요.” 새파랗게 질린 선생님께선 겁 없이 지껄이는 내 입을 틀어막곤 신신당부하셨다. “다신 그런 말 하면 안 돼. 너도, 선생님도, 너희 엄마·아빠도 싹 다 잡혀가.” 군부 독재의 시퍼런 서슬을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전경들이 교정 안까지 들어와 곤봉으로 학생들을 개 패듯 하는 걸 보며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부모님까지 다칠 수 있다는 공포에다 운동권 일각의 교조적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날 주변인에 머물게 했다. 시위에 적극 동참할 수도, 완전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던 신입생 시절 몇 번인가 ‘배달 요원’을 자원한 적이 있다. 누가 봐도 시국엔 관심 없는 날라리 복장을 하고 당시 유행하던 ‘엘○○’ 브랜드 배낭 안에 유인물을 실어 날랐다. 딱 한 번 불심검문으로 소지품 검사를 당했는데 마침 배달을 막 끝낸 뒤라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젠 40~50대가 되어 486 또는 586이라 불리는 이른바 ‘386 세대’의 흔하디 흔한 후일담이다. 우리의 청춘은 반독재 투쟁 혹은 방관자로서의 부채 의식에 짓눌렸으나 그래도 혹독한 취업난에선 자유로웠다. 웬만한 대학을 나오면 웬만한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고, 성적이나 스펙을 따져 묻는 면접관도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저마다 생활인이 된 우린 너나없이 자녀 교육에 올인 하다 너나없이 노후 대비가 막막해진 처지다. 우리의 중년은 심난하고, 노년은 암담한 이유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어떤가. 전쟁 통에 생사를 넘나든 어린 시절에 이어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기를 보낸 그분들은 여전히 굶주림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요샌 별미로들 찾는 보리밥이나 수제비를 진저리 내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 세대는 ‘헝그리 정신’으로 국가 경제의 고도 성장에 이바지했다는 벅찬 자부심과 함께 노년에 먹고살 자산도 웬만큼 쌓아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럼 전쟁도 독재도 겪지 않은 요즘 청춘들, 바로 우리 아들딸 세대의 당면 문제는 무얼까. 다들 아시다시피 답이 없다는 거다. 대학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준비생’에 머문 채 최대 소망이 ‘정규직’인 아이들을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부모들도 답을 찾지 못한다.



 지난 2002년,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잃어버린 20년’에 접어들던 일본을 취재하러 갔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 교수는 자식 걱정부터 털어놨다.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장성한 아들이 부모 집에 눌러앉아 ‘파라사이토 신구루(parasite+single)’로 산다는 거다. 한국과 달리 스무 살만 넘으면 독립하는 게 당연시되던 일본에선 예삿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아들 역시 당시 일본의 많은 젊은이처럼 편의점과 음식점 알바 등을 전전하는 ‘프리타(free+arbeiter)’ 신세였던 모양이다.



 뭐든 일본을 뒤따라가는 한국이다 보니 이 문제 역시 남의 일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슬픈 예감은 꼭 틀리질 않았다. 정작 일본은 최근 경제가 되살아나 올봄 대졸자 취업률이 97%나 됐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꿈도 비전도 없이 최저 시급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이런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사람들 북적대는 출근길의 지하철엔/좀처럼 카드 찍고 타볼 일이 전혀 없죠/집에서 뒹굴뒹굴 할 일 없어 빈둥대는/내 모습 너무 초라해서 정말 죄송하죠/위잉위잉 하루살이도 처량한 나를 비웃듯이 멀리 날아가죠…’.(혁오 ‘위잉위잉’)



 어쩌면 이러다 우리 아들딸들은 평생 짜릿한 성취감 한 번 느껴볼 기회조차 없이 부모와 사회의 걱정거리로 사는 데 안주해버리는 건 아닐까. 한여름 납량 특집극보다 더 무서운 이 예감만은 부디 틀려야 할 텐데, 그러려면 너무 늦기 전에 부모 세대인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할 텐데…. 미안하다, 얘들아.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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