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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지켜가야 할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

중앙일보 2015.08.03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앞날을 기약하는 꿈과 이상이 없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무기력한 진공상태로 빠져들기 쉽다. 반면 당장 부닥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꿈과 이상에만 집착하는 인간이나 공동체의 종말은 도태되어 파탄에 이를 수 있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인간이 가진 숙명이며 숙제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괴리를 인지하고 간격을 좁히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지혜로운 인간이나 현명한 공동체를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해방 70주년을 맞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70년 전 8월, 우리는 식민지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었고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계속 심화된 대결로 점철된 지난 70년은 영광과 치욕의 민족사였다. 이 과정에서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도 평화와 민족보존의 원초적 중용성이다. 전쟁은, 더구나 핵전쟁은 반드시 예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족적·국가적 지상과제로 떠올랐다.

 사실 100여 년 전에 시작된 우리의 독립운동은 동양의 새 평화질서수립운동과 함께 추진되었다. 한반도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질서는 상호 간에 작용하는 필수조건임을 안중근 의사의 옥중저서 『동양평화론』이나 3·1독립선언서가 분명하게 설파하고 있다. 이에 더해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로 시작된 핵무기 시대에 이르러선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유지 체제와 모두의 공동파멸을 예방할 핵무기 관리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공통의 이상이며 정책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일본 평화헌법과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한국과 아시아 시민들의 이러한 희망과 결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집약한 문서로 꼽을 수 있다.
 
1945년 종전을 맞은 일본은 수백만 명의 인명 손실과 군국주의가 남긴 비인간화의 유산으로 극심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실의와 비탄 속에서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 건설에 앞장서겠다는 국민적 결의를 모은 것이 바로 46년에 제정된 일본국헌법이며, 특히 전쟁의 방기(放棄)를 선언한 제9조였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한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는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영원히 이를 방기한다.’ 이와 더불어 육해공군 등 전력을 갖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은 극도의 이상적 집단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모두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며 목표임에 틀림없다.

1991년 독일이 통일되며 냉전이 끝나는 것을 지켜본 남북한은 민족공동체 복원을 지향한 기본합의서에 동의하고 유엔 동시 가입을 실현했다. 이어 그 여세를 모아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여 아시아와 세계평화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의 10%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격렬한 전쟁을 한반도에서 치렀던 경험을 돌아보며 핵무기 시대에 우리 민족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 비핵화라는 결론에 양측이 쉽게 합의한 것은 시대적 소명에 부응한 현명한 결정이었다. 아마도 합리성에 더해 민족보존에 대한 본능이 발동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2015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68년 전 일본헌법의 전쟁포기 선언이나, 23년 전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은 지켜가야 할 이상임에는 틀림없지만 현실성이나 실현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초강대국화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란 현실에서 일본의 안보를, 그리고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 강화만이 생존을 보장한다고 믿는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의 안보를 평화헌법이나 비핵화 공동선언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정치는 힘의 경쟁인 동시에 명분의 싸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정 지도자나 체제의 안전을 위해 모두를 공멸의 길로 끌고 가겠다는 입장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정치는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의 창조적 혼합과 선택의 예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 한민족 해방과 분단 70년을 맞은 지금이 동아시아 관계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평화를 다짐했던 그날을 잊지 않고 국내외 정치를 모두의 평화를 보장하는, 그리고 핵 안보와 핵 안전을 최고의 정책목표로 지켜가는 순발력과 상호이해력을 발휘할 때다. 그것이 곧 아시아인들이 인간 중심의 정치를 세계에 보여줄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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