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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프로그램 없는 가족 경영, 졸지에 가족 전쟁 비화

중앙선데이 2015.08.02 00:18 438호 4면 지면보기
롯데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오너 일가의 가족 간 대결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한 편이 된 아버지(신격호 총괄회장)와 장남(신동주 전 부회장), 아버지를 해임시킨 차남(신동빈 회장), 여기에 차남의 경영 능력을 더 높이 사는 어머니(시게미쓰 하쓰코), 차남이 한국·일본 롯데를 모두 거머쥐는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직계(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등)·방계(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가족들….

경영권 분쟁은 가족 구성원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롯데그룹 경영권 다툼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학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가족 경영(Family Business)’의 한계가 드러난 사례로 보고 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경영권’ 문제가 돌출할 경우 ‘화목’은 사라지고 ‘대결’ 구도만 남는다. 이런 상황은 해외 기업들의 가족경영 사례보다 한국에서 더 두드러진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후계 승계프로그램의 부재와 폐쇄적 지배구조를 꼽는다.

가족경영, 리더십·책임감 극대화 장점
산업화의 역사가 깊지 않은 한국에서 대부분의 기업은 창업자 중심의 가족기업으로 발전했다. 가족기업의 경영은 오너에서 시작돼 가족 전체로 확대된다. 가족 경영은 장점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총수가 자신의 지분을 넘어 무한책임을 지기 때문에 기업가 정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과감한 장기 투자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실제 경영활동이 왕성하던 1983년 신격호 회장은 “나는 23개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1만5000개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소비자 가격을 모두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책임감을 갖고 꼼꼼하게 경영 전반을 챙겼다.

신동빈 회장도 2004년 10월 그룹 경영을 책임지는 정책본부장 자리에 오른 이후 10조원 이상을 들여 35개 기업을 인수하며 롯데를 재계 5위에 올려놓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과 프랑스 경영대학 인세아드(INSEAD)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업주 가족이 직간접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기업은 ▶안정감 있는 경영 ▶강력한 리더십 ▶기업에 대한 신뢰감 ▶신속한 의사결정 등의 측면에서 경쟁력이 높다.

BMW 자녀는 신분 숨기고 입사해 훈련
문제는 롯데처럼 후계구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너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형제간 지분 다툼이 시작되는 경우다. 후계 승계 프로그램이 없는 가족 경영은 구성원 간 대결 구도로 가기 십상이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두산그룹 형제간 분쟁도 유사한 경로를 거쳤다. 전문경영인이 있고 소유가 분산된 구조라면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와 대표이사를 선임하면 경영권 갈등의 소지가 없다. 특히 이렇게 선출된 대표는 임기가 정해져 있다. 연임하지 않을 경우 후계자를 찾는 프로그램이 가동돼 새 경영자를 찾으면 된다. 하지만 가족 경영에서는 이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연세대 경영학과 박상용 교수는 “경영 승계라는 공식적인 과정이 가족 내부의 일로 치부됨으로써 주주 등 이해관계자의 승인 절차가 생략되기 쉽다”며 “후계에 관한 총수의 의지에 구성원 전원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문제가 불거진다”고 말했다.

해외에는 5~6대를 거치면서도 경영권 분쟁 없이 성과를 내는 가족경영 기업이 많다. 유럽 쪽이 특히 그렇다. 오너 가문과 사회가 합심해 합리적인 승계 및 경영권 분담 시스템을 정착시킨 결과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롤모델로 삼았던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이 대표적이다. 158년 전 창업 이후 오너 가문이 5대째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엄격한 승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발렌베리는 윤리·정도 경영을 표방하며 가문 내의 될성부른 인재들을 치열하게 훈련시킨다. 승계자가 되려면 대학 공부를 스스로 벌어서 하고 해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 그 뒤 그룹에 들어와 경영 능력을 검증받아야 지주회사 회장이 된다.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 참여는 철저히 이사회를 통해 이뤄진다. 신사업 진출과 인수합병(M&A) 등 통 큰 의사결정만 내리고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일임한다.

독일의 BMW도 비슷하다. 오너인 콴트 가문은 지분을 47%나 갖고 있지만 이사회 멤버로서 경영에 참여할 따름이다. 가문이 회장직도 맡지 않는다. 가문의 두 자녀도 대학 졸업 후 BMW의 직원으로 입사해 10년 넘게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똑같이 일해 함께 근무한 직원들도 그들이 오너 일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콴트 가문은 비전 있는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앉히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상속 혼란 시 기업가치 50% 하락’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는 롯데그룹의 폐쇄적 지배 구조도 배경이 됐다. 한국에선 비상장 회사라도 지분 구조를 공개해야 하지만 일본 기업은 상장, 채권 발행 등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지 않는 이상 지분 구조를 베일에 감싼 채 경영을 해도 지장이 없다.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416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국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집단) 전체 순환출자 고리 459개 중 무려 91%를 차지하고 있다.

공정위가 공개한 지분도를 보면 ‘롯데쇼핑→롯데카드→롯데칠성음료→롯데쇼핑, 롯데쇼핑→대홍기획→롯데정보센터→롯데쇼핑, 롯데제과→롯데칠성→롯데쇼핑→롯데제과’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출자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지분구조를 그림으로 그리면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미로찾기’처럼 복잡해진다. 롯데쇼핑 지분 0.9%를 보유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이처럼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해왔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쇼핑 외에 롯데제과(6.8%)와 롯데칠성음료(2.4%) 등 일부 상장사를 통해서도 그룹을 총괄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등 두 형제간 한국 롯데그룹의 주요 계열사 지분율은 비슷하다. 롯데쇼핑의 경우 신 회장 지분율은 13.46%, 신 전 부회장 지분율은 13.45%로 0.01%포인트 차이에 불과하다. 이들의 누나인 신영자 이사장도 롯데쇼핑 지분 0.74%를 갖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벌어질 경우 우호지분에 따라 얼마든지 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후계구도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이유다.

가족기업은 세계적으로도 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가족기업연구소(소장 남영호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에 따르면 현재 미국 기업의 92%, 노동력의 59%, 신규 직업 창출의 78%, 국내총생산(GDP)의 49%가 가족기업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경우도 상위 8000대 기업의 76%가 가족기업이다. 포드·월마트·CNN 등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37%가 가족기업에 해당한다. 박상용 교수는 “홍콩·대만·싱가포르 등에서는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시기가 늦어지고 상속에 혼란을 겪으면 기업가치가 50~60% 하락했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며 “차제에 국내 대기업들도 후계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해 자식 상속이든 전문경영인 영입이든 시장과 소비자들로부터 이해를 얻을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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