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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헤어진 엄마 찾아주세요, 도둑질 안 할게요”

중앙일보 2015.07.31 00:50 종합 10면 지면보기
33년 만에 어머니와 아들이 만났다.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던 아들은 절도범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고 “모든 게 내 잘못”이라며 울고 또 울었다.


[사건:텔링]
3살 때 부모 이혼, 가출·절도 …
두 달 전 일자리 잃어 또 도둑질
엄마 너무 그리워 형사에게 애원했다





 #아들의 고백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와 살던 김모씨는 열한 살에 가출했다. 방황하다 고아원에 갔지만 적응하지못하고 4년 만인 열다섯 살 때 고아원을 나왔다.
 지난 20일 경찰에 붙잡혔다. 밤마다 현관문이나 창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은 집들을 골라 현금을 훔쳤다. 한 달간 여섯 집에 들어가 훔친 게 총 232만원이었다. 담당 형사는 내게 “야간 절도라 구속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23일 구속됐다. 형사와 마주앉자 중학교 2학년 때 물건을 훔쳤다가 처음 경찰에 잡혀 법정에 섰던 기억이 떠올랐다. 풀려나리라는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재판부는 1년6개월간 소년원에 있으라고 판결했다. 어른들은 나를 위로했다. 오히려 잘된 거라고.



 “널 데려갈 보호자가 없잖아.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또 범죄를 저지르면 그땐 빼도 박도 못해. 소년원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배달 일을 하던 중국집이 문을 닫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김씨는 밤마다 강서·양천구 일대의 주택가를 돌며 돈을 훔쳤다.
 내게도 엄마가 있었다면…. 그때부터 엄마는 ‘그리움’과 동일어가 됐다.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나는 엄마, 누나와 함께 살았다. 얼마 후 외할머니는 우리를 아빠에게로 보냈다. 아빠와 새엄마, 할머니, 고모에게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눈칫밥을 먹다 지쳐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했다. 갈 데가 없었다. 고아원에 들어갔다. 거기에도 내 자린 없었다. 고아원을 박차고 나오면서 ‘소년잡범’이 됐다. 소년원 출소 후 좁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장 노동, 중국집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삶은 고단했다. 20년이 허망하게 흘렀다.



 두 달 전 내가 배달 일을 하던 중국집이 문을 닫았는데 경기가 어려워선지 새 일자리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빌린 돈 300만원의 이자, 고시원비, 생활비 부담이 어깨를 짓눌렀다. 다시 도둑이 됐다. 장물을 팔 재주도, 누군가를 해칠 생각도 없었다. 당장 돈이 필요했다. 지갑을 뒤져 현금만 빼왔다. ‘서툰 도둑질’이었다.



 형사 앞에서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를 만나게 해 주면 착실하게 살겠다”고 애원했다. 며칠 후 형사는 기적처럼 “엄마를 찾았다”고 했다. 33년 만의 모자 상봉이다.



 #엄마의 회한



경찰에 붙잡힌 김씨가 “ 헤어진 엄마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33년 만에 만난 모자는 서로를 끌어안은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진 서울 강서경찰서]
 처음 형사님에게서 ‘아들이 찾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그저 죄인 된 기분이었다. 아들이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미안함이 솟구쳤다. 선뜻 대답을 못했다. 돈도 없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나 같은 엄마는 아들에게 짐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3개월 후 병원진단 때문에 서울에 갈 예정이니 그때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형사님이 다시 전화를 걸어 “아드님이 구속된 상태인데 어머님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어한다”고 털어놨다. 내 아들이 경찰서에 잡혀 있다고? 세 살 때 헤어진 뒤로 못 봤다. 잘 살 거라고 믿고 잘 살기만을 바랐는데 구속이라니. 가장 빠른 차편을 찾아 몸을 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미안해. 미안하다.” 지난 29일 경찰서에서 아들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쏟아졌다. 아기 때 얼굴이 거의 안 남았는데도 ‘내 새끼구나’ 직감이 왔다.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후회뿐이었다. 애들 호적을 내게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지만 전 남편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지만 잠깐 스쳐가는 엄마가 오히려 애한테 방해될까봐 조심스러웠다. 삯을 받고 남의 집 밭일이나 하는 엄마가 찾아가면 뭐하겠나 싶었다.



 긴 이별, 짧은 만남. 얼굴을 본 지 두 시간 만에 다시 유치장에 들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여러 번 말했다. “죽을 먹든 라면을 끓여 먹든 엄마가 같이 있을 테니까 이제 나쁜 마음 먹지 말고 감옥서 나오면 엄마랑 같이 살자. 사람답게 살자.”



 #엄마 찾아준 조수호 경위



 “제가 고아로 자랐어요. 엄마를 볼 수만 있으면 앞으로는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절도범 김씨는 조사받는 내내 엄마를 찾았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신상은 기억을 못했다. 자기를 학대하던 아버지, 누나의 이름, 마당에서 오자미놀이를 하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김씨의 제적등본, 아버지의 이름을 토대로 전북 부안에서 김씨 어머니가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모자 상봉을 주선했다.



 김씨를 본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가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난 김씨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이 기사는 지난 6월부터 서울 강서구·양천구 일대에서 절도행각을 벌인 혐의로 강서경찰서에 붙잡힌 김모(36)씨와 김씨 어머니, 담당 형사 등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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